글을 쓰는 게 어려운 이유는 어떤 글을 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이 써 버릇하지 못해서, 많이 만들어보지 못해서, 어디서부터 다른 이의 말을 빌리지 않고 온전히 내 얘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두 번 글을 쓰려면 우선 글감을 찾아야 한다.
일주일에 두 번 글을 쓰기 위해 애타게 글감을 찾는다. 아침에 먹는 요구르트에서, 우연히 눈치챈 누군가의 거짓말에서, 나의 욕심에서, 덧없음에서, 몇 달째 끝내지 못한 책의 표지에서, 끝없이 글감을 모색한다.
하지만 글감을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난 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지? 묘사는 쉽다. 하지만 내 언어가 녹아들어야만 “내 글”이 될 텐데. 주변의 미대생 친구들이 졸업을 앞두고 엄습하는 불안감에 내뱉는 말들이 맴돈다. “난 작가가 될 정도로 분명히 펼치고 싶은 나만의 이야기와 스타일이 있는지 모르겠어.” 내 이야기를 믿고 온전히 그것으로 살 길을 찾는 건 엄청난 용기다.
단지 시각적 표현이 자연스럽고 즐거워서 미술을 시작한 사람들은 갑자기 미술이 다른 모든 기회비용을 희생하고 전업으로 삼을 만큼의 가치인지에 대해 판단해야 한다. 꽤 잔인한 선택이다. 물론 모든 진로 고민이 그렇지만 순수 예술이 보다 불리한 입장에 서있다고, “예술가”라는 타이틀이 언제부터 그렇게 특별하고 노블해 보였는지 모르겠어서, 그래서 일상의 예술은 왠지 더 저열하고, 타협된 행위라고 함부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교만한 위계는 콤플렉스가 되고, “넌 창작을 할 수 없어”라는 거짓된 구별만 깊게 만들더라.
프로페셔널한 창작을 생각하면 항상 힘이 들어간다. 아카데미아의 창작 과정은 “그냥”을 용납하지 못한다. 왜, 어떻게, 내가 내린 결정들인지 설명해야 하고, 어떤 주제를 선택하는지도 매우 중요해진다. 이런 프로세스에 길들여지더니 끄적끄적 낙서를 할 때도, 아무 말이 쓰고 싶을 때도, 차트 음악을 들을 때도 주제의 깊이에 집착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친구가 스케치북을 선물해주면서 “난 네가 고등학교 때 그리던 낙서들이 너무 좋았거든”라고 했을 때 매우 얼얼했다. 맞다, 나 낙서를 많이 했었지. 이런 작은 창작의 순간들을 언제부터 누리지 못하게 되었던가. 내 예술이 전공이 된 후부터 일부는 죽었음을 깨달았다.
이젠 일상의 예술과 함께하고 싶다. 느낌의 발현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이고, 가치를 검열하지 않을 때 해방된다. 쓸모가 상관없는 글감, 그냥 쓰는 글에게 찬미를! 그런 소망을 이 모임에 두며 앞으로도 글 쓰고 싶다.
— 2019년, 나의 첫 글쓰기 모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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