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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레스트 May 18. 2024

사모라고 부르지 마세요

사모 에세이

몇 개월 전, 기독교 문화사역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커뮤니티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드러내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자극이 되고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자신의 사역에 대해 열정과 애정을 가진 여자분이 계셨다. 그분은 어깨가 펴져 있고, 눈빛은 총명했으며, 대화를 할 때도 거리낌이 없었다. 낯을 가리는 탓에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틈에서 그분의 이야길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나에게도 인사를 건네셨다.


나는 자연스럽게 내 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문예은이고요, 교회 사모예요^^”


그러자 그분과 함께 일하던 동료분이 “저희 대표님(그 여자분은 대표였다)도 사모예요!”라고 대신 말을 해주셨다.


그러자 반짝이던 그분의 눈빛이 흔들리며 어색해진 표정으로 한 마디를 툭 던지셨다.


“아휴.. 진짜! 나 사모라고 부르지 마!”


순간 스스로를 사모라고 소개한 나는 뻘쭘해졌다. 물론 그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사모라는 이유로 궂은 편견과 선입견을 이겨낸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니 교회 밖에서는 굳이 ‘사모’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본인이 하고 싶은 사역을 할 땐 눈빛이 반짝 거리며 당당하셨던 분이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으면 사모로 불리는 걸 단호하게 거부하셨는지 이런저런 예상을 하는 것만으로 안쓰러워졌다. 사모로 불리기 싫은 이유를 여쭤보고 싶었지만 실내는 북적대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사역을 소개하느라 분주했기에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나는 내가 사모인 것이 좋다. 자기소개를 할 때 이름 다음으로 사모가 나오는 걸 보며 ’아, 나는 내 정체성을 사모로 정했구나!‘라는 생각에 새삼스럽게 놀라기도 한다. 나는 사모의 삶을 통해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모라는 정체성을 통해 나의 달란트를 발휘하며 살고 있다. 내 삶에서 ‘사모’라는 키워드는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되었고, 그런 내 모습이 나는 꽤 만족스럽다.


하지만 내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사모 1년 차 땐 교회도 나가기 싫을 정도로 사모라는 정체성을 거부했고, 남편에게 속하는 사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 같은 대우에 불만도 극에 달했었다. ‘사역자는 사모하기에 달려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 사역자는 스스로는 아무것도 못해? 꼭 사모가 도와줘야 돼? 그렇게 무능력해?’라는 반발심이 올라오는 걸 꾹 참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랬던 내가 사모의 삶을 나누기 위해, 서로 교제하며 힘든 얘기를 좀 하고 싶어서, 인스타그램에서 ‘문사모’ 계정을 만든 것은 내 인생에서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만으로도 위로가 되었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모님들에게 ‘힘내세요!’라는 댓글을 받으면 그 말이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느껴져 마음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또 내 이야기를 통해 힘이 된다고 장문의 디엠을 보내는 분들을 통해 나는 이 사역의 명분을 얻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만의 사모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사모가 된 지 5년 차고, 첫 사역지를 제외하곤 교회에서 사모라는 이유로 특별히 나를 힘들게 하거나 외로웠던 상황이 거의 없었다. 어떤 교회는 사모가 SNS를 하는 것도 다 지켜보는 탓에 남편 선에서 SNS 활동이 차단(?) 당하기도 한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해서 사모 사역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감사고, 내가 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모님들은 사모라는 이유로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참고만 있어야 한다. 남편은 바쁘고 얘기를 털어놓을 곳도 없고 막막한 상황 속에서 사모의 삶을 거부하기도 한다. 어쩌면 ‘사모’라는 정체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분들에게 굳이 ‘그래도 사모로서의 정체성을 찾으세요! 사모도 행복할 수 있어요!’라고 말할 순 없다.


나는 사모의 삶을 거부하진 않지만, 너무 힘들기에 어떻게든 이겨내고 행복한 사모가 되고 싶은 분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언제까지 이 사역을 할 수 있을지, 언제 어떤 환경을 만나 이 사역이 한계에 부딪힐지 예상은 할 수 없지만, 나의 이야기를 통해 단 한 명의 사모님이라도 힘과 용기를 얻는다면, 그래서 마침내 ‘사모’라는 정체성을 거부하지 않고 내 삶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는 나를 당당히 사모로 소개하며 이 사역을 계속해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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