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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Oct 12. 2020

나를 '읽고 쓰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들

무엇을 왜 쓰는지

나는 글을 쓴다


남편과 다투었다. 책 구매에 과도한 지출을 한다는 남편의 잔소리 때문이었다. 많아야 한 달에 10만 원인데, 난 그 돈을 쓸 자격도 없는 건가 싶어 화가 났다. “나는 당신이 깎고 놔둔 발톱도 주워 버리고 당신 속옷도 손빨래하는 사람인데, 그 정도 돈도 아까워? “소리를 지르다가 집을 뛰쳐나왔다. 술집에 들어가 맥주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직원에게 종이와 펜을 빌려 나의 결혼에 대해서 휘갈기며 글을 썼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들이 기습적으로 자주 나를 건드리는데, 그 불편함은 너무 사소해보이는 것들이라 심각하게 불평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억누를 때가 많다. 이 감정이 적절한지 가늠하는 일조차 망설인다. 하지만 솟구치는 감정은 내 안에 실재하고, 때때로 나 자신에게 조차 마음껏 감응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설움을 느낀다. 

그럴 때 나는 글을 쓴다. 글을 쓰지 않으면 내 감정은 어떤 의미가 부여될 기회를 갖기도 전에 지워져 정말 사소한 것이 되어버리고, 나는 사소한 것에 예민한 유별난 사람이라는 오명을 스스로에게 씌우게 된다. 결혼을 유지하며 불편함과 불쾌함을 느낄 때마다 글을 쓰며 알게 된 것이 있다. 내 설움의 원인이 엄마와 무관하지 않고, 내 감정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란 걸 말이다.

엄마의 삶을 되짚어보며 결혼 생활의 본질이라는 걸 유추해본다. 여자에게 결혼의 본질은 ‘희생’인 걸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엄마는 “내가 뒷바라지할 테니 나처럼은 살지 마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엄마는 내가 자신과 다른 삶을 살게 하려고, 아빠의 모진 가정폭력을 견디셨다. 자식을 번듯하게 키우기 위해선 본인이 참는 것 외엔 다른 대안이 없다 여기셨던 듯하다.

어쨌든 나는 엄마가 견딘 고통의 최대 수혜자이고, 당신의 바람대로 번듯한 성취를 한 사람이 되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정상적이지 못한 내가 정상의 궤도에 오르는 일은 좋은 학벌과 직장을 가지는 일이라 여겼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름의 성취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아무것도 성취한 게 없는 보잘것없는 여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남편은 결혼 후에도 “직장을 계속 다니든 그만두든 괜찮다”며 마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인 듯 말했지만, 사실 내겐 선택지가 없었다. 일을 하려면 가사와 육아의 공동분담이 필요하다고, 육아와 살림을 도맡는 상황이 너무 벅차다고 호소할 때마다 남편은 상투적으로 굴었다. 나의 힘듦은 여자의 숙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내 태도의 문제 때문이라는 듯, 자신은 나의 고통에 무고하다는 듯 말할 때 낭패감을 느꼈다. 나는 토끼몰이를 당하듯 한계에 내몰렸고 그곳에 다다르자 출구는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니까, 아이들을 위해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엄마는 내가 엄마와 다른 삶을 살게 하려고 희생하셨는데, 결국 엄마의 희생은 내 삶을 씌우는 굴레가 되었다. ‘희생하는 엄마’라는 이상향의 덫에 걸려 버린 거다. 내가 포기한 것은 겨우 커리어일 뿐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커리어 이상의 많은 것을 잃은 듯했다. 그래서 자꾸 화가 나고, 왈칵 서러웠다. 분명 내가 선택한 희생인데 행복과 직결되지는 않았다.





읽고 쓰는 나의 삶


남편이 아이를 양육하는 데 드는 품을 함께 나눴다면 직장을 그만두지 않아도 되었을 거다. 나는 남편을 질투했다. 돈 버는 일을 하고, 돌아오면 쾌적하게 정리 정돈된 집이 있고,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고, 깨끗하게 씻긴 아이들이 방긋 웃고 있고, 방해받지 않는 잠을 자고, 일어나 다시 집 밖을 나가 일하며 업무를 완수했다는 만족과 성취감도 느낄 수 있는 남편을. 

질투, 분노, 슬픔과 같은 감정이 일 때마다 글을 썼다. 나는 고분고분하게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내 안에 있는 불만을 감추고 싶지도 않았다. 나의 불평이 ‘여자의 징징거림’ 즈음으로 치부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놓인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읽고 쓰기를 시작했다.

아이를 낳고, 강경수 작가가 쓴 『나의 엄마』라는 책을 읽었다. 전생애에 걸쳐 딸이 엄마를 부르는 장면을 모은 그림책이다. 책을 다 읽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목소리를 듣자 울음이 터졌고, “엄마는 언제부터 엄마가 됐어? 나는 엄마 때문에 이렇게 잘 자랐는데, 나는 내가 ‘엄마’인 게 너무 무서워”라고 울며 말했다. 그즈음, 나를 보며 웃고 우는 아이를 보며 나 또한 자주 웃고 울었다. 아이는 사랑스러웠지만 육아는 버거웠고, 육아나 살림이나 사회생활이나 무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책 소개에 ‘곁에 있어 주는 엄마의 모습과 그 순환적 운명을 반영한…’이라는 문장을 읽고, 엄마의 삶을 떠올렸다. 그리고 엄마의 삶이 내게 얹혀지는 것을 상상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여성의 삶은 운명적으로 엄마와 엮여 있는 건지 질문이 던져졌다.

반듯하게 엄마와 아내의 역할에 충실히 사는 친구들 사이에서 모성은 내 삶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하는 내가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완고한 가부장적 마인드를 가진 남편과 살며 나는 규정된 이미지를 재현하며 제한된 선택을 하는 예속된 위치에 속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을 했고, 벗어나고 싶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 2의 성』을 읽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유명한 문장은 여성이 내재화한 ‘여성스러운’ 혹은 ‘엄마다운’과 같은 이미지들은 사회문화적 산물로서 여성을 타자화 하는 도구가 된다는 뜻이다. 

보부아르가 말한 ‘자유로운 실존’으로 여성 해방이 어떻게 가능할지 오래 고민했다. 모성과 여성성을 인정하는 것이 여성을 억압하는 거대 구조에 가담하는 것이 아닐지 고민했다. 벨 훅스, 아이리스 매리언 영, 낸시 프레이저 등과 같은 여성학자들의 책을 이어서 읽었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성찰과 고민을 하는 일은 피곤했지만, 내가 결혼 생활을 버티는 목적을 찾는 것은 중요한 과제였기에 멈출 수 없었다. 

아니 에르노라는 작가가 쓴 『얼어붙은 여자』라는 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아빠, 아빠가 보스고, 영웅이에요.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빠예요. 그것만이 자연스러워요. 아빠가 가장 크고 아빠가 가장 강해요. 엄청 빨리 달리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아빠예요. 엄마, 엄마는 착한 요정이에요. 아기가 배고프고 목마르면 오는 사람이에요. 엄마는 누가 부르면 항상 달려오는 사람이에요.” 

나는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아이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돈을 벌어서 내 통장에 돈을 저축해주는 사람, 엄마는 내게 밥을 해주는 사람”이라고 아이가 말했다. 돈과 밥에 얽힌 우월과 열등의 의미를 아이가 이해하고 한 말은 아닐 거다. 하지만 밥을 하는 돌봄 노동보다 돈을 버는 생산 활동이 더 가치 있게 여겨진다는 걸 곧 이해할 터였다. 

그럼에도 여자가 하는 그 자질구레하고 중요치 않아 보이는 일들이 바로 가족을 건사하는 숭고한 노동이라고 하시던 엄마의 말씀이 떠올랐다. 엄마는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의무라고 생각하라고, 여자가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아이들은 엇나가기 마련이라고 하셨다. 아이들이 잘못 클 수 있다는 말에 나는 움찔했다. 불온한 엄마라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꼈고, 아이들이 나처럼 불안한 감정을 가진 유년기를 보내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엄마의 말은 가혹했다. 엄마는 여성이 ‘희생’이라는 단어조차 쓸 수 없는 그러니까 ‘원래 무엇도 소유하지 않은, 그래서 포기할 것이 없는’ 하등의 지위를 운명적으로 가졌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주부의 노동은 착취적이다. 착취는 다른 사람을 위해 노동하고, 그 결과물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이전되는 것을 뜻한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이 말한 것 처럼 나의 노동은 ‘남편과 아이가 보다 창조적인 일을 할 수 있도록 편히 쉴 수 있게 한다거나, 남편의 지위나 그가 둘러싼 주변 환경이 좀 더 좋아지게 한다거나, 성적 서비스나 정서적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존재한다. 내가 가졌던 일말의 유능함들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고, 자존감 또한 부쩍 줄어들고 있다. ‘노동 시스템이 사용할 수 없거나 사용하지 않으려는 사람’, 주변인이 된 거다. 

아이리스 메리언 영이라는 여성 정치철학자는 『차이의 정치와 정의』에서 억압의 다섯 가지 모습을 착취, 주변화, 무력함, 문화제국주의, 폭력으로 설명했다. 이 억압의 모델을 빠짐없이 찾을 수 있는 게 바로 ‘전업주부’이다. 엄마가 말씀하신 ‘여자가 하는 숭고한 돌봄 노동’의 민낯은 전혀 숭고하지 않다는 걸 책을 통해 알았다. 





나의 불행에 귀기울이다


글을 읽고 쓰며 내가 나에게 질문하고 대답했다. 불편하다고 말하는 이야기들을 끝까지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고, 나는 나의 불행을 계속해서 들었다. 불안과 불행 때문에 시작한 읽고 쓰기였지만 그를 통해 내가 변한 걸 느낀다. 성난 얼굴과 격앙된 목소리로 분노만을 표출하던 나는 이제 남편에게 조곤조곤 내 생각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무엇에 화가 나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고 내 분노가 정당함을, 나는 말할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큰 변화는 아니지만 의미 있는 변화다. 나는 나의 불편함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글쓰기를 지속하자 남편 탓, 엄마 탓, 구조 탓만 해오던 나의 태도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불합리한 환경 속에서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불합리한 요구를 순순히 수용해온 내 태도 또한 문제였다. ‘엄마’는 삶의 특유한 서사가 읽히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는 것을 못 마땅해했지만 습관적으로 나의 욕구와 욕망을 풀 죽이려 노력했다. 그래야 매끈하게 결혼이 유지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웃고 있는 엄마와 엄마의 등을 바라보며 우는 아이, 웃고 있는 아이와 아이 등을 바라보며 우는 엄마와 같은 이분법적인 이미지는 그만 그리기로 했다. 아이의 행복과 나의 행복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생각도 그만두었다. 매끈한 결혼 생활을 위해 나의 생각과 태도를 마모 시킬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욕구와 감정에 대해 생생한 목소리를 내는 엄마이자 아내로서 존재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불편함을 주제로 주로 글을 쓰고 읽는다. 내가 서 있는 이 위치에서 전업주부의 의미, 일의 가치, 권력, 갈등 관계 등에 대해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그게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글이고, 잘 살기 위해 읽어야만 하는 글이다. 나는 냉소하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해보고 싶다. 결국 내가 갈망하는 것은 ‘평화’고 ‘행복’이기 때문이다. 나의 평화와 행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아이들과 남편 모두의 행복이다. 행복은 ‘감정을 털어놓고’, ‘함께 대면하고’, ‘서로 해명하고 이해하고’, ‘책임을 짐’ 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낙오자가 없는 모두의 행복이 가능할까?’ 의문하지만 쓰고 읽으며 그 방법을 찾아본다.  ‘




# 민들레 131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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