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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난 Mar 06. 2020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혐오와 수치심>, 마사 누스바움이 던진 문장1. 혐오의 내용


폭력의 이름, 아버지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어머니가 오셨었다. 소파에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어머니께 물었다. "엄마, 왜 아직 아빠와 이혼하지 않는 거야? 나는 아직도 아빠가 미운데, 엄마는 아빠를 용서했어?” 마치 이 오래된 미움이 어떤 통증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언뜻 물어보았다. 깃털처럼 가볍게 보낸 질문은 어머니께 묵직이 박히는 듯했고, 다만 아이를 응시하셨다. 어머니는 망설이듯 긴 여운을 두고 입을 떼셨다.


 "너 중학교 즈음에, 자고 있던 네 아빠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목을 조르더라. 그 날은 크게 다툰 날도 아니었는데. 느닷없이 내 몸에 올라타더니만 목을 누르는 거라. '이게 무슨 일인고?' 상황 판단도 하기 전에 의식이 가물해지더라고. '진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마음이 희한하게 편안하더만. 고요해지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때  네 아빠가 손아귀 힘을 푸는 게 느껴졌어. 나는 의식이 돌아오면서도 '이대로 그냥 죽고 싶다..' 생각했지. 네 아빠가 얼마나 지독했는데. 용서가 쉽겠나. 이제는 용서를 했다 싶다가도 불쑥 미워질 때가 지금도 많다."

 

 처음 듣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말에 과거의 수많은 일이 발작을 일으키듯 회상되었고, 나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버지는 포악한 독재자였다. 사소한 기분에 따라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가족을 위협했다. 가스레인지의 점화가 잘 되지 않는 이유가 순종적이지 않은 어머니의 자세 때문이고 맞아서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각목을 들고 온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예측 불가하고 비이성적그의 태도는 절대성을 띄었다. 가족을 대상으로는 온갖 추악하고 난잡한 행동을 해도 무방하고, 주기적으로 자신의 더러움을 쏟아 내는 일이 마땅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조건이나 제약이 붙지 않는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에 가족들이 불복하는 것을 못 견뎌하셨다. 순종과 관용은 어머니와 나에게 마땅한 자질이었어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무서워했고 힘이 없었지만 결코 침묵하지 않았다. 분개한 눈으로 얼마나 대단하게 아버지가 패악한 지 조목조목 따졌다. 신발도 신지 못하고 현관문을 뛰쳐나가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 조무래기 같은 인간아. 사람답게 살아라.”라는 말을 뱉고 나가는 분이셨다. 아버지에게 자신을 멸시하는 어머니의 태도는 큰 모욕과 수치였다. 아버지는 힘과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가족을 위협했지만 그럴수록 그의 권위와 자격은 의심받았다. 모든 귀책사유는 어머니에게 있으므로 자신의 폭력은 마땅한 측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훈계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말은 아버지에게만 상식적이고 정당해 보였다. 그 누구도 합의한 적 없는 실존하지 않는 권위에 매달리는 사람은 아버지뿐이라는 사실을 본인만 몰랐다.  


아버지를 혐오하다


 내가 우연적이고 운명적으로 내던져진 가정은 정상과 비정상이 정확히 반반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는 아버지와 분별 있고 타당한 행동을 하는 어머니를 번갈아 보며 자랐고, 나는 비정상적 대상에 대한 분노와 혐오를 고통과 함께 느꼈다. 나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일에 과도하게 집착했다.


 나를 구성하는 일에 치열했던 사춘기 무렵,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와 닮은 구석이 있나 노심초사하며 얼굴을 뜯어보았고, 명랑한 표정과 평온한 목소리, 교양 있는 말투를 연습했다. 내 얼굴에 나도 모르게 붙어 있을지 모를 '아버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었다. 기괴하게 어그러진 사람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쉽게 억측하여 분노하고, 고의를 가지고 가족을 해하려 하고, 대화의 시도조차 불능한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내 존재가 괴로웠다. 나는 어떤 악의적인 의도에 의해 그에게 결박되었다 생각했고, 그것을 부당하다고 여겼다. 아버지와 내가 핏줄로 이어지는 것을 나는 동의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운명을 건성으로 받아들이기엔 내 인생에 그의 영향력은 지대했고, 나는 내 모습에서 아버지를 지워내고자 분투했다. 아버지의 부도덕함과 상스러움을 증오했고, 이 증오는 필연적으로 아버지를 혐오하게 만들었다.  


 정치 절학자이자 여성학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그의 저서 <혐오와 수치심>에서 혐오의 핵심적 관념과 형태에 관해 면밀하게 고찰한다. 그는 "감정은 지향적 대상에 초점을 두며, 그러한 대상에 대한 평가적 믿음을 수반"(67쪽) 하고, "감정을 경험하는 사람이 그러한 대상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에 달려있다"(56쪽)고 말한다. 혐오의 핵심적인 사고는 역겨움을 유발하는 대상이 자신을 오염시킬 것이라는 생각이며, "혐오의 감정은 자신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거부를 표현"(186쪽) 하는 것과도 같다. 또한 혐오는 오염과 순수함에 대한 신비적 사고를 지니는 것으로 전한 대상과 부정한 대상 간에 위계적 구조를 나누고 이 위계적 구조를 견고히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정 집단과 대상을 혐오스러운 존재로 낙인찍을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가 사회와 개인의 삶 속에서 타당한 역할로 작동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내 삶의 토대로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기로 했고, 그와 무관한 존재가 되기 위해 혐오의 방식을 취했다. 아버지와 나의 격을 나누고 그를 저열하고 천박한 대상으로 여기는 반면 나를 순수하고 도덕성을 가진 존재로 평가한 것이다. 아버지의 유일하고 핵심적인 성질을 '잔인한 폭력성'으로 두고 그 외의 모습은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주위에서 '성실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평가되었고, 실제로 그는 매우 부지런하고 봉사하는 일을 즐겨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긍정적인 부분조차 부정하고 폄하했다. '심지어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사람'으로 평가하며 아버지의 긍정적 면들의 근거를 삭제했다. 아버지를 멸시받기 마땅한 비정상적인 인물로 대상화하 혐오하고 배제시키려는 나의 태도가 타당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를 혐오하며 나는 더 우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을까. 과연 아버지는 내 삶에 배제되었을까.


혐오의 무의미함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혐오하지만 그가 내 삶에 분리되었다 볼 수 없다. 아버지는 내게 남성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또 실질적 통제권을 지닌 권력자의 상징으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세계관에 아버지는 일종의 부정적 잣대처럼 여겨져 왔고, 그런 아버지가 내 삶에 배제된 존재라고 보기는 어렵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혐오하고 있지만 내가 정상적인 삶을 산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내가 순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이제 안다. 내 안에 있는 취약함을 아버지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할 뿐, 내가 가진 치명적인 면면들을 나 스스로는 잘 알고 있다. 나의 비정상성은 아버지의 것과 별 차이 없다. 그럼에도 아버지를 계속해서 혐오하는 것은 혐오하는 일이 제일 쉬운 방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아버지의 통제권으로부터 벗어났고, 이따금 이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만 잘 다독인다면 큰 문제없어 보인다.

 

 어머니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는지 질문한 것은 나를 향해 물은 것이기도 하다. 용서를 구한 사람도 없는데, 나는 왜, 누구를, 무엇을 용서하고 싶은 걸까. 용서는 일종의 완충지대와 같아서 용서의 대상을 일단 그곳에 놓기로 결정하면 더 이상의 큰 마찰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나는 나의 편안함을 위해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아버지를 혐오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감정에 담긴 평가적 요소를 검토하려면 결국에는 사실적 믿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실과 타당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71쪽)는 마사 누스바움의 말처럼 혐오에 관한 진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 분노와 혐오는 차이가 있다. 분노는 부당함에 대한 인지와 개선에 대한 의지, 회복의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혐오는 다르다. 잘못된 것이 재편되기를 희망하지도 않고, 응답을 구하지도 않는다. 혐오의 대상과의 단절만이 유일한 목표가 된다. 나는 아버지의 부당함에 분노하여 맞서는 대신 혐오하여 회피하는 길을 택했다.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지 묻는 질문을 더 이상 유예하지 않기로 한다. 아버지를 향한 나의 혐오는 자기기만적 성격을 띠고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도식 안에서만 아버지를 평가하지 않기로 한다. 혐오의 대상을 더 이상 혐오하지 않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아버지를 상상해보는 일이다. 내가 아버지와 유사한 상황에 놓인다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아버지는 어떤 개인적 환경을 가진 사람인지, 그가 절대적으로 믿는 신념은 무엇에 기인한 것인지 나를 아버지에 자리에 놓고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내게 있어 '가해자'의 역할이었고 이제껏 단 한 번도 그 역할을 지운채 아버지를 바라본 적 없다. 내가 아버지의 역할이 되어 상상해 보는 것, 내가 가해자의 위치에 놓였을 때 보게 되는 것,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을 허문채 한 개인을 바라보는 것. 모두 낯설다. 상상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도 해본 적 없으니 이 노력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 예측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적절한 감정을 성취하려는 몸부림은 모든 인간에게 힘겨운 투쟁"《혐오와 수치심_75p》이라는 마사 누스바움의 말을 기억하며, 힘겹지만 유의미한 이해의 투쟁을 시작해 본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가늠해보기 위해 혐오를 지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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