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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높빛 Dec 25. 2021

연말이 오면 슬퍼지는 사람들

다가오는 내년은 나만 바라봅시다

   오늘도 퇴근을 위해 지하철을 탑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케이크와 선물을 들고 갑니다. 나도 아해를 위한 선물과 선물을 포장하는 포장지, 그리고 편지를 사들고 집에 갑니다. 크리스마스만큼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하게 보내는 날은 몇 없을 것입니다. 종교를 믿지는 않지만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낍니다. 연말 분위기를 느낄 때 즈음이면 혹자는 그런 분위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해도 작년에 내게 그렇게 이야기 했던 것 같습니다. 아해를 포함한 이들이 이런 감정을 가지는 이유는 '1년을 더 먹는 것에 대한 슬픔이 직면하는 순간'이 바로 이 연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늘은 이 주제로 한 번 짧게 이야기를 건네보려고 합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몇몇 사람들은 초조해 합니다. "내가 정말 옳은 길을 가고 있나", "이 나이 때 이룬 것이 뭐가 있나" 하는 걱정거리와 함께 연말을 보냅니다. 조금은 씁쓸한 부분인데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욱 심한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情) 문화의 폐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양과 다르게 동양은 농경문화 위주로 발달하였기 때문에 개인성보다 이타성(여기서부터는 정을 이타성으로 표현하겠습니다)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동양인의 이타성과 관련하여 한 방송의 다큐멘터리에서 실험을 한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실험에서는 동양인-동아시아 지역의 사람-과 서양인-대체로 서유럽과 북미 지역의 사람-에게 영어 'E'를 써보라 하였는데 동양인들은 대체로 상대방 기준으로 E가 보일 수 있도록 좌우를 반전시켜 작성하고, 서양인들은 본인의 시각에서 E를 그리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조금은 조심해야 할 것이 나는 여기서 우생학(優生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화는 상대적인 것이고, 각 지역민의 성향은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튼 이러한 이타성이 발달하게 된 것은 앞서 농경문화로 그 사유를 채택했는데, 체감이 안오겠지만 농업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입니다. 농경사회를 겪어본 적이 없는 내가 유일하게 이러한 점을 체감하는 시기는 '김장'할 때 입니다. 우리 가족은 동네 인근에 있는 주말농장에서 수확한 배추와 파, 무 등을 이용해 김장을 하곤 합니다. 수확하고 나르고 김장을 하다보면 옛날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처럼 농업사회는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고, 가문끼리는 집성촌을 조성해 노동력을 공유할 수 있는 구조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이웃이나 인근의 사촌이 결국 '남'이 아닌 '우리'가 되었고, 이들의 대소사가 우리의 일이 되기 때문에 결국 상대방에게 관여하게 되는 이타성이 발달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동아시아 3국 중 한국에 이타성이 더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지속적인 전쟁으로 오랜 왕조가 지속되지 못해 개인주의적인 영역이 생성된 중국과 분열된 봉건사회를 오랫동안 유지해 상호 배타적인 영역이 생성된 일본과는 달리 강한 중앙집권체제 속 대부분 외침으로 왕조의 전환을 맞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부의 결속이 더 단단해졌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타성은 세계화를 경험하는 우리 세대에게 다시 독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세대는 조부모와 부모 세대로부터 일원화된 출세의 길-좋은 대학을 졸업하여 좋은 직장과 집, 자가용을 소유하는 윤택한 삶-에 대한 가르침으로부터 20년 동안 길러졌고, 우리들 중 대부분은 그러한 가르침과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다른 국가의 청년과 다르게 사서 걱정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여기서 부모 세대와 조부모 세대를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하고, 한국이라는 국가가 개발도상국으로 가난에 허덕이던 시절-에는 그런 마인드가 당연했고 어쩌면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성공하는 합리적인 방법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학력과 학벌은 이제 성공의 척도가 아니며, 미디어와 기술의 발달로 다양한 경로로 좋은 직장, 자가용, 집을 구할 수 있으며 좋음의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척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모 세대의 마인드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괜히 좋은 대학과 기업을 다니는 사람 앞에서 종종 내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고, 집과 차량에 광적으로 집착해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는 하우스푸어와 카푸어는 늘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방향의 연장선 상에 '나이를 먹으면서 생기는 걱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이 나이에 이것저것 이루었는데 나는 뭘했지 하는 고민은 결국 이타성에서 기반한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도 나라는 잣대를 또 자신과 들이밀며 나에게 우월감을 가질 것이라는 생각까지 나아가게 되면 내 스스로는 더 우울해질 것입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잣대에서 조금은 '개인성'을 가져봅시다. 결국 따지고 보면 사회에서 몇 년 늦거나, 늦은 시기에 기회를 가지는 것은 100세라는 인생의 삶 속에서는 마이너스 요소는 아닐 것입니다. 일전에 학과 동문회장-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고, 고위 공무원으로 재직한 선배-님과의 식사 자리가 있어 한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 친구들 엔지니어링(건설업)에 잘 안가려고 하는데 엔지니어링 가는거랑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가는거랑 나중에 벌어본 거 보면 다 비슷해.


  물론 당신의 말은 중견, 중소기업에 지원해서 빠르게 커리어를 쌓는 걸 권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나는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빠르게 직장을 구하든, 느리게 직장을 구하든, 대기업을 가든, 중견기업을 가든 결국 사람은 먹고 살 만큼 벌게 되어있고, 인생이라는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다 비슷하게 흘러간다고 해석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속도나 위치가 아닌 그저 나 자신에 대해 수용하고, 나의 삶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 하나로만 사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금은 뜬금 없을  있겠지만 곤충과 관련한 이야기 중에 매미와 관련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어보고자 합니다. 매미는 애벌레로 평균 5년을 사는데  중에는 2~3 만에 우화(성충으로 탈피)하는 녀석도 있는 반면에 7~9년에 거쳐 우화하는 녀석도 존재한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2 만에 나온 매미나 9 만에 나온 매미나 공평하게 20일에서  달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고 합니다. 이 점은 조금 슬프지만 25살부터 일하든 35살부터 일하든 65세까지는 일만하다 노후를 보내는 우리 사람하고도 별 차이는 없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다시 매미 이야기로 돌아와 2년이든 9년이든 결국 어른이 되고 나서는 나온 햇수에 구애받지 않고 '나답게' 행동하는 매미들처럼 아해가 방황하든, 조금은 늦게 아해가 원하는 꿈을 이루든 간에 아해답게 아해의 삶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크리스마스인데 말이 많이 길었습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와 따뜻한 연말이 되었으면 합니다. 2022년은 '아해다운 아해로서의 한 해'로 아해의 2022년을 크리스마스 트리 꾸미듯 꾸몄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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