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야채 호빵의 봄방학> 리뷰
한 학교 폭력 사건이 화두다. 초등학교 수련회에서 벌어진 일. 여러 학생이 야구 방망이까지 이용해, 한 아이를 폭행했다고 한다. 교장과 가해 학생 부모가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기사마저 올라온다.
이처럼 학교 폭력을 다룬 기사를 보게 될 때면, 나는 내 기억에서 도망치고 싶어진다. 나 또한 학교 폭력의 생존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겪었던 폭력과 비슷한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물밀 듯이 밀려오는 과거의 기억들. 아직도 내 기억은 폭력의 한가운데에 있음을 느낀다. 나는 폭력을 겪었던 때에서 자유롭지 않다. 학교 폭력을 겪은 뒤, 내 삶의 화두는 언제나 그 기억이었다.
그래서 내가 믿지 않는 말이 하나 있다. “현재에 집중하라.” 자기계발서부터 인문학까지 ‘삶의 지혜’를 이야기하는 곳엔 꼭 등장하는 격언이지만, 나는 저 말이 미심쩍다. 한 번도 상처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든 말 같아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산다. 그들의 시간은 ‘시간순대로’ 흐르지 않는다. 상처받았던 과거의 언저리에 계속 머물면서, 그 주변을 맴도는 것일 뿐이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 스무 살의 기억들이다. 학교 폭력과 가정 폭력의 골이 깊었던 순간들. 나는 2017년의 오늘이 아니라, 그 기억 속에 산다. 이것이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네이버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야채호빵의 봄방학>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새 학기의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삼는 이야기. 그 주인공은 “도시락은 나를 얼마나 챙겼는지 볼 수 있잖아요”라는 이유로, 급식 대신 직접 만든 도시락을 매일 챙기는 고등학생 ‘야채’다. 그의 일상은 점심시간 교실에 혼자 남아 도시락을 꺼내먹는 것. 그러던 와중 같은 반에서 자신처럼 도시락을 가져온 ‘나비’를 발견한다.
야채는 그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도시락을 들고 다가서지만, 정작 나비는 야채를 소스라치게 두려워하며 교실 밖으로 도망친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지 고민하는 야채. 그가 나비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그 고민은 나비를 새로이 이해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나비가 집단 따돌림을 당했었고, 아직도 그 상처가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야채는 다시 도시락을 싸서 나비에게 말을 건다. 그가 놀라지 않게, 멀리 앉아서 조심스럽게. “미안해, 나라도 덩치 큰 애가 갑자기 말을 걸면 놀랄 것 같아”, “혹시 정말, 정말 괜찮다면, 도시락 같이 먹을래?”
또 다른 등장인물인 담임선생님은 야채와 같이 조심스럽고 섬세한 행동을 이어가는 사람이다. 야채와의 개인 상담에서 도시락을 혼자 만들어오는지 물었다가, 그걸 한참 동안이나 후회하는 모습에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혹시라도’ 야채의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있는데, 그의 상처를 건드린 질문 일까 봐. 선생님은 “괜한 걸 물었나.” 하는 생각으로 하루 종일 끙끙대며 미안해한다.
나비가 지각을 모면하기 위해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서는, 교실에 일부러 늦게 도착하기 위한 핑계를 찾기도 한다. 출석체크를 하러 교실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교무실로 다시 향하면서 말이다. “출석체크를 하려면 역시 볼펜이 필요하다”고.
<야채 호빵의 봄방학>은 이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한 사람들의 행동이 주를 이루는 만화다. 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소한 핑계와 배려, 미안함이 윤리라고 생각한다. 늦는 사람을 보고 ‘사정이 있겠거니’하고 눈감아 줄 수 있는 타인에 대한 상상력, 자신의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계속 상기하는 감수성. 그리고 야채와 나비, 또 야채와 선생님 사이의 대화가 품어내는 조심스러움.
거기엔 혹시나, 또 혹여나 타인의 상처를 내가 건드릴까봐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끙끙대거나, 결국 이렇게 조심스레 시작하는 말이 있다. “혹시 정말, 정말 괜찮다면.” 나는 저 대사가 아름답다고 느낀다. 타인을 위해 아주 조심스럽게 가다듬은 말. 어쩌면 이것이 내 앞의 타인을 대하는 최선의 윤리라고 느낀다.
<야채 호빵의 봄방학>에서 주인공들이 타인을 대하며 보여주는 태도는 한국 사회에서 더 특별하다. 존중은 대개 차별적이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존중해야 하는가, 누가 존중받을 수 있는가, 국가로부터 존중받는 이는 누구인가. 나이가 많은 사람, 비장애인, 남성, 대졸자, 사장님, 국회의원. 이렇게 놓고 보면, 존중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치적이고 선별적인 일에 가깝다. 반대로 그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들은 소외와 차별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이루는 것들은 눈 감아 주기, 다른 이의 처지를 상상하기, 미안해하기와 같은 사소한 존중들이다. 이것들은 주변에 놓인 사람이 자신과 같은 일상을 사는 이에게 줄 수 있는 존중이다. 주변이 주변에게 주는 존중, 일상의 조심스런 존중, 평등과 가까운 존중. 이것은 비슷한 위치성에서 나온다. 나와 닮은 타인을 아는 감각에서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사실 호빵과 나비가 비슷한 상처를 공유한다는 것이 암시되고, 둘 다 교실 한편에서 혼자 도시락을 먹던 사람이라는 설정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상처를 가진 사람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사람을 귀신같이 알아챈다. 그때 나와 닮은 타인. 그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은 나의 상처만큼이나 깊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타인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 내가 생각하는 윤리는 여기서 나온다.
서울 소재의 초등학교 수련회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 가해자들의 윤리 없음에 대한 분노는 둘째 치고서라도, 나는 이 사건을 기사로 볼 때마다 제대로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나의 기억과 겹쳐서, 피해자의 모습에서 자꾸만 나를 보게 되는 것만 같아서. 나는 그의 슬픔을 가늠할 길이 없으면서도, 내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 스무 살의 기억을 떠올려 상상하고는 마음이 덜컥 내려앉곤 한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해, 나와 비슷한 피해자에게 말을 걸고 싶어진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을 내가 소개하는 이유는, 그리고 또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프고, 괴롭고, 상처받아, 과거에 사는 사람들이 만드는 조심스런 언어가 다른 피해자에게 가닿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담아낸 그 대사들. 그것은 윤리에 가깝다. 상처받은 사람이 자신의 상처를 닮은 타인을, 과거에 사는 사람이 과거에 사는 사람을 조심스럽게 안아내는 윤리. 그렇게 과거 속에 머물면서도 지금 서로를 환대받는 존재로 바꾸어내는 윤리.
나는 꿈에서라도 이 사건의 피해자를 만난다면 억겁의 고민 끝에 이렇게 말하고 싶다. “혹시 정말, 정말 괜찮다면, 도시락 같이 먹을래?”라며 도저히 슬프게, 또 조심스럽게.
글. 서아람(aramstudio@daum.net)
특성이미지 ⓒ웹툰 ‘야채호빵의 봄방학’ 캡쳐
*이 글은 고함20(www.goham20.com)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