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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연한 여행자 Jul 10. 2023

나를 믿지 마세요

신뢰보호가 없는 나라

얼마 전에 윤석열 대통령이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관련해서 "변별력은 갖추되 학교 수업만 열심히 따라가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출제하고, 학교 수업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은 출제에서 배제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해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다.


수능시험을 5개월 앞두고 대통령이 수능 난이도를 쉽게 하라는 취지로 발언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고, 수능시험 문제 출제와 관련해서 당연하고 원론적인 내용을 확인한 것뿐이라는 반박도 있다.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올린 유명 강사가 소속되어 있는 입시학원을 포함한 대형 입시학원들에 대해 과세 당국이 세무조사를 하겠다고 하는 등 후폭풍도 만만치 않다.  


어느 주장이 맞는지를 떠나서 결과적으로 수험생과 수험생을 둔 부모라면 민감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혼란을 야기한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이번 사안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사법시험 1차 시험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법무부에서 갑자기 객관식 시험 문제를 기존의 5지선다 방식에서 8지선다 방식으로 변경하고 문항당 배점도 기존의 40문제에 문제당 2.5점이었던 것을 문제 난이도에 따라 2점, 3점, 4점 등으로 변경한 일이 떠올랐다.


당시 법무부에서 발표한 8지선다 방식으로 출제하겠다는 이유는 합격자의 변별력 강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당시 시험 준비를 하고 있던 나를 비롯한 고시생들은 굳이 시험일이 불과 한 달 남은 시점에서 그렇게 갑자기 변경을 할 급박한 공익이 있었는지 무척 의문이었다. 1년 가까이 5지선다 방식으로 시험을 준비해 왔는데 시험이 불과 한 달 남은 시점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8지선다 방식으로 출제한다고 하니 정말 모두 패닉에 빠졌었다.


더 웃긴 건 당시 우리나라에서 8지선다 방식으로 낸 시험 자체가 없었던 까닭에 8지선다 방식의 문제집이 존재하지 않았고 고시학원 강사들 역시 8지선다 방식으로 문제를 출제해 본 적이 없었기에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8 지선다형으로 나올지 아무도 몰랐다는 것이다. 정답을 8개의 답안 항목 중 1개를 고르는 것인지 아니면 여러 개를 고를 수도 있는 방식인지부터 아무런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고, 나를 포함한 수험생 모두 시험을 불과 한 달 앞둔 상태에서 극도의 불안을 겪었고, 결국 고시학원에서 어찌어찌 급조한 8지선다 방식의 모의고사를 한 번 정도 보고 1차 시험을 치렀던 기억이 난다(다들 모의고사를 보면서도 법무부가 말한 8지선다 방식이 이런 방식으로 출제되는 것이 맞는지 반신반의(半信半)하면서 봤던 기억이 난다).




사실 생각해 보면 2007년 사법시험 1차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대학입시를 하면서도 매년 입시 방식이 바뀌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대학입시에서 본고사가 있어서 수능보다는 본고사 위주로 공부를 했다가(당시에는 본고사에서 수학 한 문제만 더 맞으면 내신이나 수능점수를 충분히 만회를 할 수 있었다), 2학년이 되니 갑자기 본고사가 폐지되고 논술로 대체되었고 내신과 수능 비중이 다시 중요해져서 내신이 나빴던 친구들이 대거 자퇴를 하거나 전학을 갔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었던 1997년 수능은 역대 최고로 어렵게 출제되었고(특히 수학), 이에 따라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어려운 수능을 대비해서 공부를 했었는데 정작 1998년 수능은 엄청 쉽게 출제돼서 점수가 1997년 대비 평균 40점 정도 오르는 등 점수 인플레가 장난이 아니었다(다들 수능 보고 집에 가서 채점해 보고 엄청 잘 본 줄 알고 다음 날 기분 좋게 등교를 했는데 학교 와서 보니 다른 사람들도 엄청 잘 봐서 좌절했다).  


그 이후에도 입시제도는 매년 바뀌고 복잡해져서 이제는 어떤 전형이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만큼 입시제도가 자주 바뀌는 나라가 또 있을까, 미국 같은 나라는 입시제도를 오랫동안 큰 변화 없이도 잘 운용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만 유독 이렇게 입시제도를 자주 바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상황을 반복해서 겪으면서 낸 결론은 우리나라는 한마디로 신뢰보호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나라라는 것이다. 이건 어느 정권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리나라가 이렇게 신뢰보호가 없는 나라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떤 제도를 도입해서 시행했을 때 문제점이 지적되면 이를 보완해서 수정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더 근원적인 이유는 어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할 때 문제가 발생하면 나중에 처리하면 되니 일단 도입하고 보자는 안일한 생각으로 사전에 충분한 검토 없이 즉흥적으로 제도를 도입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개인의 신뢰를 보호해주지 않는 나라라는 생각에 한편으로 씁쓸하다가도 이렇게 수시로 바뀌는 제도 하에 살면서도 어떻게든 이에 적응해 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렇게 신뢰보호가 없는 나라에서 살면서 '신뢰'라는 기대하지 않고 사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다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잘 적응해내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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