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홋카이도
올해 여름은 유난히 너무 일찍부터 무더운 날이 시작된 것 같다. 정말 너무 습한 날씨에 아직 7월 중순도 되지 않았는데 사람을 지치게 한다. 특히 직업상 정장을 입어야 하는 나로서는 이런 습하고 더운 여름 날씨가 힘들다. 거기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자면 정말 젖은 수건으로 숨을 못 쉬게 코와 입을 막아 놓은 느낌이다.
추운 겨울에는 뜨거웠던 여름을 그리워하게 되는데 막상 본격적인 여름 날씨가 시작되면 "그래.. 여름은 이랬었지.. 이렇게 사람을 지치고 짜증 나게 만들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걸 보면서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걸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올해는 이렇게 빨리 더워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에어컨 세척을 미리 해놓지 않았는데, 세척 서비스를 예약하려고 전화하니 2주 정도나 지나야 가능하다고 해서 오늘에서야 에어컨을 분해 세척하고 드디어 에어컨을 틀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 정도는 열대야 때문에 밤에도 더워서 밤잠을 설쳤는데 오늘부터는 시원하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에어컨 바람을 쐬고 있자면 예전에 에어컨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한 여름에도 보충수업 때문에 에어컨 없는 학교에 가서 수업 듣고 자습도 하고 했었는데 아마 지금 그렇게 하라면 절대 못할 것이다. 쉬는 시간에 잠깐 엎드려서 자고 일어나면 팔 아래와 허벅지가 땀으로 척척하게 젖어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면 문득 2015년에 일본 홋카이도 여행을 갔을 때가 떠오른다. 홋카이도는 눈 구경을 하러 겨울에 많이들 가지만 여름의 홋카이도는 날씨도 분위기도 참 좋다.
그중에서도 같이 갔던 동생과 하코다테 산 전망대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너무 덥고 목이 말라서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이자카야에 들어가서 마셨던 시원했던 삿포로 클래식 맥주와 금세 흘러내릴 것 같이 맥주잔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떠오른다. 약간 어둑어둑한 노란색 조명과 조용한 음악, 친절했던 주인분, 그리고 뭔가 아늑했던 가게의 분위기와 함께.
그리고 차를 렌트해서 후라노의 라벤더 평원을 보러 갔다가 닝구르 테라스(ニングルテラス)까지 들렀다 오는 바람에 시간이 늦어져서 캄캄한 밤길에 차를 몰고 달려오는 길에 저 멀리서 보이는 신기한 불빛을 보고 한 번 들러보자고 해서 우연히 들렀던 산속 마을에서 열렸던 마쯔리(祭り, 일본 전통 축제)가 기억난다.
한 여름밤에 컴컴한 산길에서 출몰하던 사슴과 너구리들, 무더운 한여름 밤의 선선하지만 아직 더위가 남아 있는 공기, 산속에 있는 동네의 어둑어둑한 노란색 불빛, 그런 불빛 아래에서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마을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모여 있던 모습, 가판대에 펼쳐진 여러 가지 음식들과 호객행위를 하던 상인들 그리고 가판대에서 오코노미야끼를 사서 먹고 플라스틱 컵에 맥주를 담아 마시면서 축제 여기저기 구경 다녔던 기억은 뭔가 지브리 애니에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한 장면 같은 비현실적인 기억으로 남아서 여름밤만 되면 떠오른다.
2015년 여름의 홋카이도 여행은 하코다테에 머물렀던 2박 동안 밤마다 안개가 많이 끼는 바람에 세계 3대 야경이라고 하는 하코다테산에서 볼 수 있는 한반도 모습의 야경도 결국 못 보고 왔고(마지막 날 하코다테를 떠나는 날에 날씨가 좋아서 삿포로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선선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무더웠던 날씨로 인해서 힘들었었지만 우연하게 맞닥뜨린 상황들로 인해 여름만 되면 떠오르는 기억에 오래 남은 여행이 되었다.
올해 여름도 예상치 못하게 일찍 찾아온 무더위만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예상치 못한 에피소드가 많이 생기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