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축구로 중국에 가기까지, 그 성장 기록
이 글은 ‘아마추어 축구인의 성장과 배움’에 관한 것이다. ‘아마추어? 그럼 취미로 좀 열심히 한 수준 아니야? 네가 프로선수는 아니잖아’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조금은 특별한 감정을 담아 축구에 임했으며, 꽤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소정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국제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세 가지 차원의 고민을 했다.
1) 개인의 기본 역량은 어떻게 향상하는가?
2) 좋은 팀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3) 효과적인 전술 / 전략이란 무엇인가?
축구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나름의 답을 내려야 하는 고민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내가 축구 속에서 느낀 바들을 공유한다면, 약간의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한 번 돌이켜 보는 시간도 가지고 싶었다.
어릴 적 축구선수를 꿈꿨으나 부모님의 반대라는 핑계 아닌 핑계로 제대로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다. 좋아하는 길을 외면해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패배감이 마음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아마추어 활동이라도 ‘끝을 한 번 찍어본다면 그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나름 축구를 잘하는 편에 속했으나 대학에서 만난 사람들은 차원이 달랐다. 20살 당시의 나는 걸음마 수준이었다. 그래서 매번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마음의 상처가 될 말들도 꽤나 많이 들었다. 그게 너무 분했고, 극복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분야에서만큼은 당당해지고 싶었다. 다시는 나를 무시할 수 없게끔 성장하고 싶었다.
축구를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이 20살 때다. 전에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었고, ‘체계성’이라는 것은 생각할 줄 모를 때였다. 그래서 일단 인풋을 늘렸다. 1학기에 13학점만을 신청해 여유 시간을 확보했고, 1일 2회의 훈련 스케줄을 짰다. 오전에는 혼자 개인훈련을 했고, 저녁에는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것만으로도 몸에 변화가 생겼다. 운동량이 많아지니 체력, 스피드, 힘 등이 자연스레 좋아졌다. 모든 운동의 근간이 되는 기본 신체능력이 향상된 것이다.
기본기도 제대로 익히기 시작했다. 축구에서 기본기는 ‘공을 다루는 가장 기초적인 기술’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는 공을 1) 받는 방법(트래핑)과 2) 이동시키는 방법(패스, 킥)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가지를 부드럽고 정확하게 수행할수록 ‘기본기가 좋다’고 말한다.
사실 기본을 익히는 데는 왕도가 없다. ‘정확한 방법으로, 많이, 꾸준히’만이 답이다. 나의 경우 동아리 선배들, 나보다 잘하는 친구들에게 귀동냥으로 훈련법을 배웠고, 말 그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을 가지고 놀았다.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운동장에 가기 힘든 상황에는 동네 아스팔트 골목에서 연습을 했다. 그 흔한 과 MT도, 대학 축제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1년 정도를 보냈다. 물론 1일 2회 훈련 스케줄을 완벽하게 지키진 못했고, 지금 돌이켜보면 볼품없고 아쉬운 순간도 많다. 하지만 인풋의 절대량만큼은 확실했다. ‘나보다 열심히 하는 아마추어가 과연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긴 했다.
무자비한 인풋만으로도 실력이 꽤나 향상되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벽에 부딪혔다. 대학 축구동아리에만 해도 중고등학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들이 많았고, 과거 축구선수 생활을 했었던 ‘선수 출신’들은 넘을 수 없는 벽에 가까웠다(특히 내가 속해 있는 동아리는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학교 내 대회에서는 늘 우승 후보에 속했다).
더욱이 나는 동아리 내에서 자주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비난을 받을수록 의기소침해졌고, 운동장에서 내려오는 길에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정말 잘하고 싶은데… 난 왜 이것밖에 안될까’라는 생각에 많은 시간을 괴로워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효율성’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면 최고의 배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는데, 내가 찾은 답은 고려대학교 축구부 선수들이었다. 고려대 축구부는 차범근, 홍명보, 박주영을 배출한 최고의 엘리트 축구 집단이다.
당시 나는 대학 스포츠 잡지를 만드는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고려대 축구부 감독님을 인터뷰한 경험이 있었기에, 그 인연을 살려 색다른 요청을 했다. 바로 전지훈련에 참가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얼핏 보면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으나, ‘일반 학생의 입장에서 전지훈련을 겪어보고, 그것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지 생생하게 전달하는 체험기사를 쓰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승낙해주셨다. 그렇게 나는 강원도 태백에서 선수들과 합숙생활을 함께 하게 됐다.
훈련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각종 기술, 전술 훈련은 기본이고 낙하산을 달고 뛰고, 모래사장을 누비는 체력훈련까지. 일반인인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훈련 그 자체로 실력이 늘었다기보다는 관찰을 통해 얻은 배움이 컸다. 최고의 선수들은 특정 기술을 사용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정확히 발의 어느 부위로 공을 다루는지, 또 공이 없을 때 어떻게 움직이는지 등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끊임없이 머릿속에 되새겼다.
또 다른 수확은 상대방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합숙 훈련 후 내가 만난 상대들은 아마추어였다. 그중에는 과거 선수 생활을 했던 ‘선수 출신’들도 있었지만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현역 고려대 축구부에 비할 바는 아니다. 게임으로 치면 최종 보스를 만난 후, 일반 몬스터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 설령 상대방의 실력이 나보다 뛰어나다 하더라도, 이미 최고를 경험해봤기에 두렵지는 않았다.
선수들과는 합숙 훈련 후에도 꾸준히 교류를 이어갔고, 지속적으로 배움을 청했다. 그중에는 국가대표로 선발돼 월드컵에서 활약한 사람도 있었다. 덕분에 최고 선수들의 훈련방법, 경기를 임하는 태도, 경기 운영 방식 등을 익힐 수 있었다.
1년 반쯤 지났을까. 많은 발전이 있었고, 기본은 웬만큼 익혔다. 이제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훈수를 두는 사람들은 많았는데, 사실 그들의 조언은 와 닿지 않았다. ‘개인기보다는 패스가 우선이다. 빠른 타이밍에 패스를 해라’, ‘슈팅을 아끼지 말고 때려라’와 같은 원론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그것을 모르는가? 말은 쉽지만 적절하게 구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런데 소위 축구를 잘한다고 자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앵무새처럼 똑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선수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기술을 ‘체득’한 단계였다. 최고의 시범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초심자가 어떻게 배워나가야 할지 디테일한 코칭을 해주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렇게 쉬운걸 왜 못하지?’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를, 그리고 경기 상황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패스를 할 때 내 디딤발은 어디에 있는지, 발의 어느 부위로 공을 맞추고 있는지, 상체는 얼마나 기울이는지, 무릎은 얼마나 굽히는지 등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선수들의 그것과 비교했다. 센티미터 단위로 몸을 조정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다시 바꾸고, Lean한 수정과정을 반복 적용했다.
전술적 플레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축구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흔한 팀 플레이 중 하나가 2:1 패스다. 공격자 2명이 재빠른 패스를 통해 상대 수비 1명을 제치는 기술이다. 그래서 많은 조언자들이 2:1 패스를 열심히 하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굉장히 복합적인 판단 과정이 필요하다. 내가 2:1 패스를 시도하려는 것을 미리 눈치채고 대비하는 수비수도 있고, 공을 주고받는 동료가 그 기술을 펼치기에는 부적절한 움직임을 펼칠 때도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적 변수에 대한 심도 있는 고려 없이 그저 ‘왜 그때 패스를 하지 않았냐’고 다그칠 때면 한숨만 나왔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디테일하게 경기를 바라보려 노력했다. 상대 수비수의 위치, 우리 팀원들의 플레이 패턴, 각 개인의 기술적 역량, 운동장 상태 등은 물론이고 상대 반응 유형에 따른 다양한 액션 플랜을 짜보았다. 그리고 이것들을 기록했다. 훈련이 끝난 후 집에 돌아오면 노트를 펼쳤다. 특정 상황에서 각 선수들의 위치가 어디였는지, 공의 흐름은 어땠는지, 나는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개선해야 할지 등에 대해 적었다.
그리고 팀원들을 분석할 때면 그 밑바탕에 이해와 공감을 두려고 했다. 밖에서 보면 어이없어 보이는 플레이라도, 당사자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왜 그렇게 했는지, 당시 그 사람은 상황을 어떻게 인지했는지 등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때, 경기를 제대로 볼 줄 아는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결국 내가 해야 하는 건 팀플 레이고, 그러려면 팀원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피상적인 부분만 바라보고 누군가를 다그치고 싶지는 않았다. 비난만 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4~5년이 지난 후에는 다른 팀원들과 함께 팀을 리딩 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당시 기술적으로는 웬만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팀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1) 커뮤니케이션, 어떻게 유도할 것인가
기업도, 축구팀도 모두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원한다. 그런데 사내 주니어, 동아리 후배들은 자기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기가 참 어렵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의견이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불확신, 누군가가 이를 비난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기회는 강제로 부여하고, 대응은 부드럽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마추어로서는 오버스럽긴 하지만 팀 미팅을 자주 가졌고, 미팅 초반에 후배들이 의견을 개진하도록 강제했다. 물론 표현은 완곡히 했다. 또 의견에 대한 비판은 최대한 자제했다. 당시는 후배들의 커뮤니케이션 양을 늘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건설적인 비판도 최소한의 양을 확보한 다음에야 의미가 있었다. 의견 개진에 대해 긍정적인 스탠스를 취했더니 후배들의 태도가 좀 더 적극적으로 변하는 듯했다.
즉각적이고 사소한 칭찬도 생각보다 큰 효과를 봤다. 후배들이 경기 중에 한마디라도 하면 (ex : 뒤에 상대 선수가 있어요, 왼쪽 공간이 비었어요 등) “말해줘서 고맙다”는 피드백을 줬더니 선배들에게 멘트를 주는 것에 부담을 덜 느끼는 듯했다 (후배들의 멘트가 좋은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한마디라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엄지 척까지 해주면 더 좋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경기 중에 해야 한다. 경기가 끝나고 하면 늦다. 경기 중에 칭찬 한 번 받고, 자신감을 얻고, 같은 경기 내에 비슷한 행위를 반복하기 시작하면 습관으로까지 자리 잡을 확률이 높다.
2) 노력하는 사람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해야
우리는 연습 때마다 출석을 체크해 출석률이 좋은 사람은 반드시 시합 전반전에 뛸 수 있도록 했다. 순수 실력으로 짠 베스트 11은 후반전에만 출전했다. 프로가 아닌 이상 실력만 보고 스타팅 멤버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방식은 성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연습에 열심히 나오면 시합에 뛸 수 있으니 자연스레 연습 참여도가 좋아졌고, 뭐든 열정적으로 임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실력만 믿고 불성실했던 팀원들도 자극을 받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참여도가 높아진 만큼 팀플레이도 좋아졌다.
3) 자유와 통제의 균형점 찾기
“너하고 싶은 대로 다해봐~”라고 하면 팀은 망한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라고 하면 적당히 체계 잡힌 플레이는 할 수 있지만 최고 수준에 머물기는 어렵다. 또 재미도 없다. 그 중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팀 미팅에서 자유롭게 의견이 오고 가도록 한 후, 플레이 방식이 결정되면 운동장 안에서는 통제의 비율을 높였다. 자유는 가장 뛰어난 1~2명에게만 허용되었고, 나머지는 사전에 약속된 플레이를 이행하는 것에 집중했다. 다만 경기 중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상황이 발생하기에 미리 논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 경우에는 당사자에게 판단을 맡겼다. 특징적인 몇몇 상황은 경기 후 다시 복기했고, 다음에는 어떻게 대비할지에 대해 얘기했다.
‘최고의 전술’은 없고, ‘최적의 전술’만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팀 구성원들의 기량에 잘 맞는 전술을 구사해야지, 소화하기도 어려운 유명 프로구단의 그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1) 단순하지만 강력한 2~3개
프로 레벨에서는 상대팀에 대한 분석을 심도 있게 하지만 아마추어에서는 그럴만한 자료가 없다. 대회 현장에서 사전에 한 두 경기를 직관하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어설픈 상대 대응책보다는 우리 팀의 강점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사전에 준비하고 알아야 할 것은 많았지만, 실제로 나오는 전술은 단순했다.
우선 가장 잘할 수 있는 2~3개의 공격 패턴을 만들고 주야장천 그것만 연습했다. 그 2~3개를 뽑아내기 위해서는 자체 분석이 잘 돼 있어야 한다. 팀원들이 잘 구사하는 기술은 무엇인지, 신체적인 특성은 무엇인지, 최근 몸 상태 등을 면밀히 살펴봐야 가장 효과가 좋은 전술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다.
2) 전술 자체보다는 그것을 얼마나 잘 구현하는지가 중요하다
전술을 짜도 처음엔 생각한 대로 진행이 되질 않는다. 실전 경기는 정신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전술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수준’에 까지 올라야만 구현이 가능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전술에 대한 믿음을 만드는 것이었다. 구성원 중 누구 하나라도 전술을 불신하고 자기 플레이를 하기 시작하면 팀은 무너진다. 그래서 우리 전술이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성공 경험도 쌓아갔다. 강팀 상대로는 성공 경험을 쌓기 어려우니 약팀을 상대로 실험을 했었다. 실험을 하다 보면 진짜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가닥이 잡힌다.
성공 횟수가 늘어날수록 자신감이 붙었고, 꾸준히 반복하니 어느 정도 ‘체득’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전국 대회에서 우승할 때까지 그 전술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잘하는 것 중 하나를 주야장천 파니 뭐라도 되네…’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노력은 26살에 마침표를 찍었다. 20살부터 시작했으니 7년 정도가 걸린 셈이다. 그중 대부분은 힘든 시기였다. 생각보다 실력이 늘지 않았고, 남들로부터 크게 인정받지도 못했다. 팀이 성과를 거둬도 스스로에게는 만족할 수 없는 순간들이 많았다. 그러다가 마지막 1~2년 즈음에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플레이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점점 축구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결국 2013년 영월 동강기 전국 대학 동아리 축구대회에서 정점을 찍었다. 본 대회는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아마추어 대회 중 하나인데, 그곳에서 우승을 거둔 것이다. 이 정도 규모의 대회에서는 앞서 말한 ‘선수 출신’들이 즐비하다. 취미로 축구를 해온 순수 일반인들은 명함을 내밀기 힘든 곳이다(우리 팀에는 선수 출신이 없었다).
그런데도 우승까지의 과정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의 기술, 몸 상태 등에 자신이 있었고 팀원들 간의 호흡도 좋았다. 가장 자신 있는 전술로 단순하게 밀어붙였더니 원하는 플레이가 잘 이어졌다. 오랜 기간 쌓아온 노력들이 한 번에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우승을 확정 지은 후의 감동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고, 극도로 흥분한 탓에 집에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다른 팀원들이 피곤에 곯아떨어졌을 때 괜히 혼자 감성에 젖어 있었다.
‘내가 해냈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강했다. 축구를 잘하고 싶었는데 그러질 못했고, 그래서 칭찬보다는 혼나는 것에 익숙했다. 자괴감도 참 많이 느꼈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이것들을 극복하고 내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 후에는 2013 스페셜 올림픽 동아시아 지역 대회에 한국 대표팀 주장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아마추어 영역에서 열심히 활동하다 보니 해외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 열린 본 대회는 지적 장애인들과 아마추어 대표 선수들이 함께 팀을 이뤄 경쟁하는 시스템인데, 우리는 중국에 패해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래서 너한테 남은 게 뭐야?
결국 이 질문에 대해서는 ‘노력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 말해주고 싶다. 난 애초에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꾸준히, 충분히 노력했더니 발전했고, 결국 스스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아마추어로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해보았고 결과물도 쟁취했다. 덕분에 생긴 그 믿음은 삶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데 도움이 됐다. ‘비록 지금은 부족하더라도 충분히 노력하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마인드를 가질 수 있게 됐다.
또 두고두고 써먹을 안주거리가 하나 생겼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과거 함께 활동했던 팀원들과 만나면 추억팔이를 하기 바쁘다. 추억팔이도 반복하면 지겨워지기 마련인데 아직까지 이 에피소드는 끄떡없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Written by 노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