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블랙스완>
|푸푸푸의 그림
|YONG의 글
<블랙스완>은 여러모로 많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질문들에 속으로 답하느라 영화에 별로 집중하지 못했다. 이 글도 그 파편적인 질문들에 대답하느라 영화와 동떨어진 글이 될 가능성이 클 것을 미리 알린다. <블랙스완>이 개봉한지 10년. 영화를 보다가 떠오른 내 10년의 분기점 같은 순간들을 나열해보고자 한다.
2011 - 2016
이야기, 드라마를 쓰고 싶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인생을 알아봐야,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어봐야 드라마, 소설을 쓸 수 있다. 한번은 대학 졸업 무렵, 드라마 작가 아카데미에 서류 합격 후 면접을 보러 갔던 적이 있다. 그 어떤 다른 질문도 없이, 앞서 말한 저런 이유를 나열하며 10년 뒤에 오라는 통보만 들은채 면접이 끝났다. 나이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데. 전의를 상실한 채 짜장면만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결과는 예상대로 당연히 탈락.
또한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연애를 많이 해 봐야, 남자를 많이 만나봐야 좋은 사람을 찾는다, 여러 감정을 경험할 수 있다. 근데 왜 안 해? 글 쓰는 사람 되려면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지. 같은 말들. 남들은 그런 연애 감정이 자주도 찾아온다는데 그러한 감정을 쉽사리 느끼지 못했던 나로서는 딱히 여기에 맞설 말이 없었고, 점점 이야기를 쓰는 일이 어쩐지 비범한 사람만 해야할 것처럼 느껴지면서 의욕을 잃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 난 이런 말들을 들으며 너무 좁은 것들을 읽고 보고 누린 채 해 보지도 않은 채 지레 포기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017
처음 <블랙스완>을 보게된 계기를 잊지 못한다. 대학 졸업 후 작가로서의 삶과는 멀어졌지만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과는 더 가까워지긴 했다. 다만 나는 예술가를 지켜보는 사람이 됐을 뿐. 초짜 영화 기자였던 내게 벼락처럼 <블랙스완>의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인터뷰 기회가 찾아왔다.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모조리 정주행하면서 영화 <블랙스완>을 처음 만났다. 나의 첫 인터뷰 상대였으니 대충 무마해 보자 라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15분 남짓의 인터뷰를 위해 그의 모든 작품을 정성으로 보고, 정성으로 질문지를 만들었고, 정성으로 기사를 썼다. 어떠한 요령 없이 무작정. 처음이었기에 느낄 수 있던 몰입과 열정의 순간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인 걸까 생각했다. 확실한 건, 그 나이에 남들에게 폼 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2020
폼 나는 상황과는 별개로 남모를 고민이 많아졌다. 나의 능력치에 대한 의심은 커져갔는데 정작 일은 손에 익어 쉬웠다. 편하면서도 불편한 시간이었다. 일에 대한 회의도 함께 찾아왔다. <블랙스완>에서 강조하던, 예술가의 몰입을 이유로 용인 됐던 것들이 불러일으키는 부정적인 결말을 너무 많이 보기도 했다. 존경받던 예술가들이 저지르는 성폭행, 성추행, 작품 속에 드러난 크고 작은 혐오 표현. 그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고 올바른 말만 하면 무슨 재미로 보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정말 예술가라면 그런 걸까. 그래도 되는 걸까. 그런 불편한 재미라면 보지 않을래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더는 그런 것이라면 재미가 없어졌다.
심장이 뛰지 않는대 / 더는 음악을 들을 때 / 이게 나를 더 못 울린다면 / 내 가슴을 더 떨리게 못 한다면
- 방탄소년단, ‘Black Swan’ 가사
여러 생각에 휩싸였을 무렵 방탄소년단이 영화 <블랙스완>을 모티브로 한 신곡을 내놨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비슷한 시기, 비슷한 고민을 담은 노래를 냈다. 순간 잠잠하던 마음이 일렁였다. 공교롭게도 타이틀곡 ‘ON’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다른 작품 <노아>를 떠오르게 했다. 팬심에 관련된 기획 기사를 쓰기로 했고, 오전 9시부터 밤 11시까지 앉은 자리에서 써내려 갔다. 꺼져버린 초심을 찾은 줄 알고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나 돌이켜보면 그것이 일터에서 불태운 마지막 불씨 였던 것 같다. 그러고 3개월 뒤쯤에 퇴사 했으니.
2021
해가 바뀌었고 영화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지금 <블랙스완>을 다시 보며 영 딴생각이 들었다. <블랙스완>의 강렬한 캐릭터 ‘니나’보다 니나를 연기한 나탈리 포트만이, ‘Black swan’을 음악으로 만든 방탄소년단의 존재가 더 눈길이 갔다. 나탈리 포트만과 방탄소년단. 둘 다 연예계에서 바른 이미지로 ‘예술적 몰입’을 자신을 향한 긍정성으로 발현해 성공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탈리 포트만은 2018년 여성 행진 연설에서 <레옹> 이후 처음 받은 팬레터에 자신에 대한 강간 판타지가 쓰여있었다며 그 경험이 자신의 일생을 어떻게 바꾸게 됐는지 이야기하는 사람이 됐다. <블랙스완>에서 흑조에게 잡아 먹혔던 ‘니나’와 달리 나탈리 포트만은 본래의 올곧은 니나를 보다 강하게 발현시키는 쪽을 택한 듯 하다. 방탄소년단 역시 마찬가지. 나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를 연대와 공감의 방식으로 발현한다.
이런 아티스트들의 모습을 10년 전에 봤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자기 파괴적이지 않고, 닳고 닳은 남녀 연애 감정을 이야기 하지 않더라도 꽤 다양한 예술의 언어가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를 쓰려고 했다가, 남의 이야기를 쓰는 기자였다가, 이제야 내 이야기를 쓴다. 이런 종류의 글쓰기는 처음이라 여전히 어색해 남의 이야기에 내 이야기를 얹는, 에세이도 비평도 아닌 이상한 글을 쓰고 있지만, 그냥 쓴다. 앞으로 어떤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번 ‘쓰기’ 만큼은 애써 재미로 꾸며내지도, 내 안을 미움으로 후벼파지도 않는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