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운 Nov 21. 2022

<원본없는 판타지> 함께 읽고 싶었던 이유

트레바리 독서토론 2209시즌 첫 책 선정 이유에 관한 변

내 학사논문의 첫 주제는 ‘박완서의 서사와 문체가 갖는 문학사적 가치’였다. 그의 까칠한 농담투를 사랑했고, 일상에 돋보기를 갖다댄 것마냥 현실에 바짝 달라붙어있는 묘사를 읽는 게 즐거웠다. 납작하던 주변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볼록볼록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게 소설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겪어본 적 없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법도 그를 통해 배웠다. 싱아~ 가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남겨졌지만, 내가 좋아했던 건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나 <엄마의 말뚝>, <친절한 복희씨> 같은 단편집이었다. 그러나 당시 현대문학을 가르치던 모 교수님의 반응은 묘하게 까끌했다.


“좋은 시도예요. 그런데 박완서의 글과 문체가 연구할 만큼이 되나? 김훈이나 김승옥이면 몰라도.”


좋은 시도라매요 쳇. 그의 부드러운 제안은 ‘박완서로 쓴 논문을 진지하게 봐주지 않겠다’는 무언의 작심을 담고 있었고, 결국 뭘로 써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주제로 논문을 통과시키며 졸업했다. 이에 돌이켜보니 스물세 살의 나는 교수님이 하급이라고 공공연하게 탄식하던 박완서나 일본 추리소설, 에세이를 좋아하는 나를 부끄러워했던 것 같다. 열여섯 살엔 <삼국지>는 만화로 읽어봐도 노잼이었는데 <하늘은 붉은 강가>나 <풀하우스>는 뒤집어지게 재밌더라는 걸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한 적이 없고, 불과 서른두 살에도 왓챠가 700여편의 내 영화 시청 목록을 가지고 분석해 준 취향이 ‘로맨스’라는 게 멋쩍었다. 나의 취향이 소위 말하는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그리하여 여성적인’ 것이라는 게 어쩐지 견딜 수 없었다.


‘어쩐지’라고 한 건 그 당시엔 왜 그런지 스스로도 이유를 몰랐기 때문인데, ‘사회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급 떨어지는 취향이라 여기고, 급기야 취향을 부정당할까봐 두려웠다’는 걸 지금은 안다.

남성인 친구가 고은의 일기를 모은 1000쪽 짜리 책을 내게 권하고는 ‘시원시원한 마초 아저씨’라고 평하며 너끈히 웃었다. 2013년 문체부 우수교양도서로 선정된 그 책은 고은이 얼마나 자주 아내를 무시하거나 때리고 친한 술집 마담의 ‘젖가슴’과 ‘둔덕’을 주물렀는지 선연히 자랑하고 있어서 하나도 시원시원하지 않았지만, 그게 별로라고 말하면 ‘당시의 현실을 드러낼 뿐인데 작품으로 보지 않고 지엽적인 데에만 집착하냐’는 핀잔을 들을 것 같았다. <태백산맥>과 <한강>을 읽을 적에 문득 일던 불쾌감의 합을 생각하면 <토지>나 <혼불>이 훨씬 재밌노라 하고 싶은데, 그러면 네가 뭔데 감히 조정래가 별로라고 하냐는 조롱이 들리는 듯했다. (지금도 쓰면서 남의 말에 뭐 그리 신경을 많이 쓰냐는 평을 들을 것만 같다)


1) 이 책은 내가 왜 그 작품들에 열광했는지, 그러면서 왜 내 열광이 폄하당할까를 두려워하게 됐는지까지 설명해주고 있다. 사적인 농담이나 질문(이선희와 치마)의 형태를 띠고, 혹은 학술적 권위(’여성의 후진적인 독서 취향은 문학일 수 없다’는 학계)나 제도의 무력(군부정권의 전통문화 제정 사업에 여성국극 누락)을 빌려서라도 집요하게 여성들의 욕망과 성취를 변방의 것으로 찍어누르는 비의도적+의도적 시도가 이토록 역사적으로 즐비한 계보였음을 보여준다. 그를 아는 것만으로도, 여러분에게는 안도와 용기일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2) 또한, 퀴어에 대한 1930년대의 인식과, 여성 연예인에게 성애적일 것과 순결할 것을 동시에 요구하던 1960년대의 분위기와, 톰보이와 걸크러시까진 괜찮지만 진지하게 남성적인 것을 위협해선 안 된다는 1980년대의 압박이 단지 과거에 머무르지 못하고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현재적인지 느끼게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지금’을 어떻게 읽어나가야 할지 논의하게 돕는다.


3) 덕분에 우리는 원본(처럼 보이는)에 대조하며 비남성적인 문화를 사본-짝퉁-으로 여기는 태도가 정당한가 물을 수 있는 눈을 가질 터다. 그리고 주류가 될 수 있는지, 기록될지, 찬양할 만한지 의심하느라 썼을 시간을 차곡차곡 쟁여, 분명하게 아름다우나 발견되지 못했던 다채로운 문화의 장면-그러니까 명백한 원본-을 길어올리는 과정 자체에 보다 집중하고 즐기게 될 것이다.


세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길 바라며, 여러분의 독후감을 즐거이 읽고 있다. 책의 관점을 다시 비판적으로 논할 포인트를 발제에 더할 테니, 독서보다 더 즐거운 토론판이 벌어지길 기대해 본다 :-)


덧. 그때 교수님 말 고분고분 듣고 김훈 연구하는 글까지 썼어봐, <언니의 폐경> 논란 때 얼마나 창피했겠어. 페미하길 정말 잘했지 뭐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