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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iphany Jul 21. 2023

삶의 무의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른 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아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반해버렸다. 좋아하는 영화 장르가 있듯 각자가 선호하는 글의 장르, 작가의 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인간적 해석을 최대한 배제한 채 기존 상식을 뒤엎는 새로운 시각과 발견을 담담하게 써 내린 걸 좋아한다.


인생이란 매우 무겁고, 어려우며, 고난의 연속이라 잘못해서 살짝이라도 삐끗하면 와장창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별것 아니라고 인생 1회 차를 겪은 누군가가 말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길을 잘못 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 살았는가. 겁이 나서 저질러보지 않고 끝낸 일이 얼마나 많은 가. 엄격한 도덕적 잣대로 주변의 과오들을 비난하며, 스스로는 진리를 실천하며 산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진리 속에서 살기>
이것은 카프카가 어느 일기 혹은 편지에서 사용했던 표현이다. 진리 속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부정적 정의는 쉽다. 거짓말하지 않기. 본심을 숨기지 않기, 아무것도 감추기 않기다. 사비나(등장인물)에게 있어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내가 생각하는 진리 속에서 사는 것 또한 결국 타인과 함께, 타인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사는 삶에서 애초에 가능한 가정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진리 속에서 산다는 생각의 출발점은 결국 우리의 행동이 언젠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인데, (신의 유무를 떠나) 심판을 하기 위해서는 ‘그러지 않았더라면’ 벌어졌을 상상 속의 상황과의 비교가 필요한 데 인생은 반복 없이 딱 한 번 진행되고 끝나기에 그 가정 자체가 불가하다는 것이다. 심판이 불가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지금의 삶이 덧없으며 그 어떤 가치 판단을 받기도 어려우며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 잔혹한 범죄는? 역사적 사실의 판가름은? 정치인의 부정부패는? 이건 누가 심판해 주나? 이 모든 것 또한 아무 가치판단 없이 지나가는 것인가?


밀란 쿤데라는 히틀러의 나치수용소와 아프리카의 30만 희생자를 낸 전쟁을 예시로 들며 말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져도,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역사가 그를 심판하여도 그 일은 그렇게 지나가고 마는 것. ‘그래도 된다’가 아니라 ‘그런 것‘이라는 말일까.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 영원성에서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


아 이 염세주의도 아니고 비관주의도 아닌, 약간의 허무주의와 또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나 부지런하게 지적탐구를 행한 이 작가를, 냉소적이지만 너무나 세련된 유머를 구사하는 유쾌한 작가 밀란 쿤데라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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