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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나 Sep 07. 2021

집 나간 의욕을 찾습니다.

특징 : 휴가 후 늘 도주, 대자연을 앞둔 시기에 자주 도주



8월, 휴가 후유증으로 지독한 나날을 보냈다. 스스로 의문을 품고, 자책하고, 짜증도 내보다 인정하게 된 몇 가지가 있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특징 1>

누가 일을 숟가락으로 떠먹여 주지 않는 이상 의욕이 주기적으로 집을 나간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특징 2>

꾸역꾸역 셀프로 멱살을 잡고 일하다 휴가를 보낸 뒤 일상으로 돌아오면, 매일 갯벌을 힘겹게 걷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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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다. 여기에 추가로 하나 더.


<원래도 인정했지만 더 받아들여야 할 특징 1>

나는 햇빛이 없는 날이 지속되면 우울해진다.


며칠째 비가 내리는 요즘, 마침 일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시점이라 고민에 빠져있었다. 다시 일찍 일어나는 것의 힘겨움, 진척 없는 작업, 날씨도 기가 막힌 콜라보를 이루며 거북이 모드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진흙을 한데 모아놓은 커다란 통에 깊숙이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며 일상을 살고 있다. 어쩔 수 없다. 셀프로 멱살을 잡고 끌고 가며 일상을 살아내는 수밖에. 하지만 여기서도 주의할 점은, 절대 건강을 해치지 않는 선까지만. 이것은 근종 수술 후 지켜야 할 나만의 철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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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휴가 다음 주는 대자연 시기(월경 기간을 일컫는 말)가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더 한없는 게으름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휴가 내내 맛있는 걸 사 먹느라 부엌의 가스레인지 불은 거의 켜질 새가 없었고, 갑자기 일과 주방일을 또 해야 한다는 두가지 압박은 더욱더 나를 한숨짓게 했다.






남편과 결혼한 것은 너무나도 만족스럽다. 같이 있으면 소화제를 먹은 듯 속이 편해지는 사람이니까. 내 불같은 마음을 잠재워주는 소방관과 결혼해서 아주 감사할 뿐이다.

그러나 결혼과 동시에 따라온 며느리의 인생. 우리 시댁은 터치가 정말 없는 편인데도, 결혼 이후로 나에게 명절은 더 이상 꿀 같은 휴가가 아닌 느낌이 되었다. 아무도, 아무 말 없이도, 혼자만의 부담이 아주 심하다.


예전 회사 팀장님이 결혼 후 명절 초반에 잦은 복통으로 고생하셨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됐다. 설거지를 시키신 것도, 팀장님이 명절 음식을 하신 것도 아니는데 그저 단순한 심적 부담으로 그렇게 고생을 하셨던 것이다. 당시 팀장님은 굉장히 시원시원한 성격에 팀원들이 못하는 이야기도 대표님께 거침없이 주장하셨던 분이셨기에 그 얘기가 신기하게만 느껴졌었다. 하지만 몰랐지, 나도 그럴 거란 걸.


8월 휴가는 명절이 아니니 며느리의 의무 같은 건 없었다. 이게 얼마 만에 느끼는 결혼 전 명절 느낌일까. 주말을 포함해서 9일을 내 맘대로 굴러다니며 살았다.  






나는 한 번 재밌는 소설을 집으면 끝도 없이 그 세계에 빠져드는 편이라, 완결까지 빠른 시일 내로 해치우곤 한다. 좋은 영화, 소설 등을 통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미친 듯이 빠져드는 그 느낌이 좋다. 이렇게 몰입한 뒤엔, 몰입했던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며 후유증을 앓는 시간도 필요하다. 이땐 자연 냄새가 가득한 근교 카페로 향하곤 했다. 커피, 풀냄새, 볼에 닿는 바람, 신선한 공기. 여름 풀내음은 그 어떤 향기보다 좋다.





이렇게 살다 보니 마음씨도 고와지는 기분. 명상도 마사지도 필요가 없었다.

행복했던 만큼, 지나치게 자유로웠던 만큼 지독한 후유증을 앓을 거라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나.






매몰차다 매몰차.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어떻게 의욕이 이렇게 싹 사라지나.

휴가 전 주에 폭주 기관차처럼 신나게 달리던 나는 어디로 도망갔나.







휴가 후 첫 월요일에 커피를 얼마나 마셔댔는지. 진한 아메리카노를 아침부터 들이켰는데, 오후까지도 무기력 상태라 우중충한 얼굴로 두 번째 커피를 내렸다. 그래도 시원치 않아 마카롱, 초콜릿 쿠키, 샌드위치까지 아주 야무지게 와구와구 해치웠다.


예전엔 커피를 마심과 동시에 작업을 시작했었다. 그러나 카페인이 돌기 전까지는 의욕도 돌지 않아 자괴감으로 30분에서 1시간을 꽉 채우다 꾸역꾸역 속도에 불을 붙이곤 했다. 이제는 굳이 그렇게 나를 혹사시키고 싶지 않아서 카페인 기운이 돌 때까지 딴짓을 하다 작업을 시작한다.






그림 그리기 싫은 마음을 끄적이다 이 그림이 얼렁뚱땅 완성됐다는 건 좀 아이러니하지만 이렇게 억지로라도 나를 다시 일하는 세계의 열차로 밀어 넣었다. 기차는 출발했고, 나는 구겨 넣어져서 달리는 중이다.


그렇게 한참 잘 달리는 듯 싶었는데- 비루한 체력으로 새로운 계획과 일을 동시에 밀고 나가는 건 아직 힘들다. 그래도 구겨진 채로 조금씩 손가락부터 움직이다 보면 다시 발가락도 무릎도 하나씩 펴지겠지. 그래서 저녁마다 강도를 높인 운동을 하는 중이다. 일단 운동부터 하면서 몸을 깨워야 정신도 깨어날 것 같다. 몸과 정신은 이어져 있으니까. 내 몸아, 내 정신아- 빨리 깨어나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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