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bbatical Year on the road
(말라가)
버스 타고 6시간 후면 지중해가 보이는 말라가다. 남편 지인의 부인이 딸과 살고 있는 곳에 며칠 머물기로 양해를 구했다.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무턱대고 며칠 신세 지러 가니 집주인 속내가 어떨지 모르겠다. 마드리드를 떠나 5시간 가까이 오는 동안 가장 많이 본 게 올리브나무다. 광활한 평원도 놀라울 정도지 만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도 귀가 먹먹해질 만큼 꽤 높다. 버스 6시간 타기가 꽤 지루할 것 같았는데 참을 만했다. 장거리 버스 여행엔 창가 자리보다 통로 자리 가 덜 답답해서 나은 것 같다. 말라가 시내로 들어오자 나무의 종류부터 달라진 다. 키 큰 야자수가 가로수고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원색의 큰 꽃나무들도 보였 다. 항구가 가까운지 요트며 큰 배들이 정박해 있고 런던아이 같은 하얀 대관람 차도 보였다.
다행히 말라가 지인 모녀가 환영해주고 된장찌개에 밥은 물론 게스트 룸까지 내주니 황송하기까지 했다. 식사하며 여자들의 수다가 이어지고 각자의 얘기들을 하다 보니 앗싸! 나랑 동갑에다가 주인장, 이분도 20대 젊은 시절 이미 세계 오지 여행을 섭렵하셨고 이젠 외국 학교에서(베트남, 스페인 말라가) 한국어 강사로 일하고 계신다. 처음 만났지만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던 데는 나름 뭔가 공통점들이 있었던 거다. 나이 듦의 좋은 점 중 하나는 누구 랑도 말 트는 데 거리낌이 적어지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서 한국어가 나름 대학의 한 학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어린 딸 등교시키는 부산한 엄마를 보니 안쓰럽기도 하고 나의 옛날이 떠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차마 “그래도 지금 이때가 좋은 거예요.”라는 말은 못 했다. 딸을 스쿨버스에 태워 보내고 나서야 아침 식사를 하는 그 엄마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대령해 주고 설거지, 빨래 널기를 거들어 줄 뿐.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감사하게도 집주인 **씨가 시간을 내어 쇼핑거리와 주요 명소 근처까지 안내해주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구시가 골목 곳곳이 마드리드와 달리 규모는 작았지 만 관광객들로 북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스페인 와서 처음으로 스페인 국민 간식 초코 라테와 추러스를 맛봤다. 팥죽처럼 걸쭉한 초콜릿에 바삭하게 튀긴 추러 스를 찍어 먹는다. 너무 달지 않고 맛있어서 자꾸 손이 갔다.
말라가는 <게르니카>를 그린 파카소의 고향이다. 비록 9살까지만 살고 고국이 아닌 외국에서 생을 보냈으나 그의 뿌리가 시작된 곳이라 남다를 거라 예상했지만 규모 면에선 마드리드나 파리를 따라가긴 턱없다고 한다. 그래도 역시 그의 명성만큼 평일에도 관람객이 많았다. 피카소는 실제 동물 키우기를 좋아했고 비둘기, 부엉이, 개, 염소, 닭, 소 등의 동물이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입체파로 유명한 그이지만 전통적인 그림 스킬 없이 새로운 사조를 창조할 수는 없다. 누구보다 탄탄한 기본 위에 자기 고유의 시선으로 대상을 공감하고 해석, 재현하는 사상과 철학이 캔버스 위에 남다르게 실현된 것. 누군가는 한 얼굴에 나타 난 여러 조각의 다른 표정들, 특징들을 과감하게 극대화한 표현에 키득거리며 웃기도 한다.
페니키아인들이 세웠다는 말라가는 한때 그라나다에 물품 조달 항구 노릇을 하면서 이슬람인들 중세 무역의 한 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드리드 주변 성당들이나 역사적 건축물 스타일이 여태 봐온 것과 달리 말라가의 대성당이나 알카사바와 성벽들은 이슬람 풍의 디자인들이 섞여서 색다른 느낌이었다. 광장을 둘러싼 골목 사이사이 카페에도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올 듯한 장식들이 눈에 띄었다. 알카사바는 11세기 무어인들이 세운 성벽 요새다. 바다와 육지 쪽을 감시하기 위해 세운 타워들 위에 서면 말라가 전체를 두루 조망할 수 있다. 요새 안에 아기자기한 작은 정원들과 방들, 분수들, 미로 같은 통로들은 천일야화 그 이상이라도 있을 법해 보이고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의 예고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앗! 성이 시작되는 입구 바로 옆엔 로마식 원형극장이 펼쳐져 있고 여전히 무대에서 공연을 한다고 한다. 이슬람의 문화는 알카사바 위로 연결되는 히브랄파로 성벽과 성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산티아고 순례 후 가장 높이, 오래 걸어 올라갔나 보다. 다행히 아직 오를 만하다. 히브랄파로 성벽 정상은 알카사바보다 좀 더 높다 보니 지중해 쪽 항구와 해변, 반대 육지 쪽 신시가지가 눈에 다 들어온다. 지중해 바다 쪽에 10층 높이 유람선이 정박해 있고 수십 대의 요트도 늘어서 있다. 전쟁 시에 성벽 아래로 화살을 날리기 위해서였는지 안에서는 바깥을 보기 좋지만 성 밖에서는 가늘고 긴 틈 정도로 보이는 구멍들이 있었다. 그 가는 틈으로 도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말라가 대성당 앞에 노란 오렌지 나무 정원이 아담하게 조성돼 있다. 성당 내부 구경은 충분히 한 것 같아 들어가 보진 않았다. 밖에서 보는 건물 외벽 창문 디자인이 이슬람 풍의 칼리프 아치(말발굽 모양)와 어색함 없이 어울리는 독특한 분위기다.
삶의 자리 곳곳에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가 또 하나의 새로운 스타일로 스며들어 있다. 각자가 있는 그대로 개성으로서 존중하고 존중받는다면 더 이상 종교의 이름으로 각자가 믿는 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게 당연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