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안식년
어제 론다에 다녀와서 약간 피곤하지만 집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지인분이 편하게 해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슬슬 불편해지고 말라가 모녀에게 내가 걸리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 이외의 타인을 더 신경 쓰기 시작한 것 같아 떠날 때가 된 듯하다. 내 집이 아닌 곳의 불편함이 서서히 압도하려는 시점인 것 같다.
노매드
한자리에 뿌리내리지 않는
어디에나
언제든지
허공 위 떠돌이 바람
머물 때와
떠날 때를
아는 것만으로도
한 낱의 존재는
자유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리는 곳에서 따라 내렸다. 관광명소를 가장 정확하게 찾아가는 나름의 노하우다. 제일 먼저 눈에 띈 산 후안 프란시스코(San Juan Francisco) 교회, 몇 백 년 된 교회에서 여전히 예배를 드리는 이곳 사람들, 경건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오늘은 아예 가이드북을 들고 점을 찍으며 명소를 찾아본다. 가끔 방향을 헷갈려 반대로 가지만 지도를 보면서 공간 지각력 훈련도 하고 나름 재미도 생겼다.
포사다 델 포르테(Posada del porte:망아지 여관)는 <돈키호테>의 무대인 도둑들의 소굴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시장통에 있는 여행자들을 위한 주막이자 마구간쯤일 것 같다. 그런데 그 바로 앞 광장 이름이 플라자 델 포르테(Plaza del porte:망아지 광장)다. 당시 그곳이 말 시장 근처라 여관에도 광장에도 말 이름을 붙였을 게다. 우리나라 강남 양재 옆 말죽거리처럼.
한국에선 오늘이 어버이날인데, 부모님께 카톡 전화도 자주 못 했다. 몹쓸 딸이다. 제 딸내미 냉정하다며 섭섭해한 바로 내 모습이었다. 카페에 들어가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보이스톡을 시도해봤지만 잡음이 너무 심해서 불가능. 대신 문자만 남기고 점심을 두둑이 먹었다. 일요일 아침이어서 최대한 조용히 나오느라 눌은밥 끓여 김치랑 먹고 나왔다. 배가 아주 고프진 않지만 떠돌이가 배라도 두둑해야 주눅 들지 않을 것 같아 점심도 구경 전에 미리 먹어두자 주의가 됐다.
첫 번째 찾은 곳은 코르도바의 알카사바다. 천년 고도의 이슬람 도시가 이사벨과 페르난도 왕의 기독교 확장 세력에 의해 함락당하고 스페인 왕의 성과 정원으로 조성된 곳이다. 기독교가 이슬람의 주거문화에 매혹당했던 것일까.
이슬람식 회랑들과 벽 문양들이 성 내부 곳곳에 남아 있고 특히 천장엔 별 모양으로 구멍을 뚫어 마치 햇빛이 램프 빛처럼 어두운 방을 은은히 밝혀준다. 성 밖엔 정원수로 심어진 오렌지 나무에서 열매가 노랗게 익어가고 초록 잎들은 그늘을 만들어 주고 연못과 분수, 화려한 꽃들과 키 큰 빗자루 모양 나무들이 영국 근위대 병정들처럼 반듯이 서 있었다. 정원엔 오렌지 나무와 꽃들 사이에 돌 벤치, 작은 연못들이 아기자기하게 배치되어 있다. 마치 비밀을 꾹 참고 있기라도 한 듯 충성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신비롭다. 밤 말이든 낮 말이든 어떤 사연이라도 다 듣고 봤을 텐데. 로맨틱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분위기다. 그 구석구석을 지금도 연인들, 친구들, 가족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두 번째 찾아간 곳은 코르도바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메스키타. 역시 일요일이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있다. 단체 관광객들 틈에 입장 줄을 섰다. 메스키타는 원래 600년대에 서고트족이 세운 성당이었다가 이후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무어인들의 모스크가 되었다. 그 후 다시 이사벨과 페르난도 시대에 성당으로 개조되었다.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당시 천 년을 유지한 이슬람 도시, 코르도바를 상상해본다. 스페인 남쪽으로 올수록 뜨거워지는 태양과 지중해의 후끈한 바람 때문인지 이전 대성당들과 달리 벽돌은 서서히 황톳빛으로 바래져 가며 칼리프의 아치형 입구들과 섬세한 음각 패턴 장식, 회랑, 천장 위에도 이슬람 스타일의 벽장식 패턴이 잔잔하면서도 화려하다. 건물 내부 전체는 수 백의 회랑 기둥들이 칼리프 아치를 떠받들면서 성당 안 끝까지 어슴푸레하게 이어진다. 당시 이곳을 가득 메운 대규모 이슬람교도들이 예배하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 같다. 이사벨과 페르난도 시대에 메스키타 내부 중앙에 있던 원래 모스크의 일부를 떼내고 고딕, 르네상스, 비잔티움 스타일까지 포함한 성당으로 재건축한 거라고 한다. 네 개 방향을 십자로 교차하는 황금빛 제단 위 중앙 돔은 햇빛을 최대한 받아들일 듯이 환하고 화려하다.
당일치기로 아침에 기차(renfe:스페인 기차 렌페) 타고 왔다가 밤 10시가 넘어 말라가 역에 도착했다. 역에서 집까지 멀지 않아 시내버스를 타려고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일단 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청년에게 집 주변 투우장을 대고 가는 버스 번호를 물으니 ‘No English(노 영어)’란다. 그때 벤치에서 기다리던 우리 아주머니들 다 한 마디씩 하신다. 투우장이란 키워드로 서로 한참 정보를 주고받으시며 종합하셨는지 어떤 한 분이 나서서 알려주신다. 어찌나 감사한지. 스페인 아주머니 파이팅!!!
난 구글 없어도 아주머니 GPS로 길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