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bbatical Year on the road
어제 밤늦게 저가항공 라이언 에어를 타고 포루토에서 바르셀로나 외곽 숙소에 거의 자정이 다 돼 도착했다. 지난밤 코골이 때문에 이틀 연이어 제대로 못 자서, 어젠 잘 잔 것 같다. 어젯밤 미국서 온 아들벌 되는 룸메이트 둘과 잠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크리스라는 청년은 조곤조곤 맞장구도 잘 치고 질문 하면서 눈도 잘 맞춘다.
아침에 새소리에 깨어나 잠깐 동네를 한 바퀴 돌아봤다. 고등학교도 바로 앞에 있고 완전 주택가에 있는 가정집을 개조한 호스텔이었다. 포루토 도심의 최악의 소음은 벗어났는데 시설은 평균 이하. 대도시 전철 한 노선 거의 끝 주거지에 있지만 그래도 도심까지 전철로 30분 정도니 그건 괜찮은 편이다. 요즘 말하는 가성비는 그럭저럭 괜찮다. 당장은 코골이도 없고 대형차 소음도 없으니 그것 만으로도 만족 :)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직장에 출근하듯 지하철역으로 갔다. 아침 산책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오자 놀이터, 가게, 학교, 미용실, 카페까지 문을 열고 있어서 사람 사는 동네 같다.
우선 바르셀로나 관광의 시작점 카탈루냐 광장으로 나선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명동 거리처럼 오가는 관광객들로 가득 찬 람블라스 거리 중앙 산책로를 따라 밀당하듯 바르셀로나에 눈길을 준다. 서로 간 보는 것처럼 지켜보며 뜸 들이는 것 같다. 광장을 지나 양편 건물들 사이로 이어지는 람블라스 거리를 지날 때는 양쪽에서 키 큰 나무들로 만들어진 초록 아케이드 경호를 받는 듯하다. 거리에는 먹을거리, 기념품 가게, 꽃 가게까지 한참 이어진다. 끊임없이 이어지 는 사람들 물결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분 당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거리 중 하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들 중 하나를 기록하며 레알 광장을 거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구엘 저택으로 향했다. 광장엔 ‘젊은’ 거지가 상대도 없이 혼자 쿵쾅거리며 위협적이다. 바르셀로나엔 다른 도시보다 젊은 거지가 더 눈에 띄는 것 같다.
람브라스 길 한편 건물들 사이에 가우디의 후원자 구엘의 저택이 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입구부터 남다르다. 젊은 가우디의 작품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다. 새 아파트 단지에 구경하는 집으로 들어가듯, 그런데 돈 내고 들어간다. 현관은 철제를 엿가락 주무르듯 어떤 어색함도 없이 자유자재로 곡선 디자인했다. 구석구석 인테리어의 섬세함이 재료를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버리는 것 없이 알뜰하고 야무지게 100퍼센트 활용하는 살림꾼의 솜씨였다. 전통 스타일이 살아 있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이 조화롭고,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절제미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3층 높이의 중앙 홀엔 그라나다 알람브라에서 봤던 천장의 별 램프처럼 자연광을 들여 작은 우주처럼 보였다. 내부 인테리어는 물론 외벽과 옥상, 지하까지 젊은 가우디의 재능과 이상, 신념, 종교, 상징들이 때론 사실적으로 때론 초현실적으로 재현되어 있었다. 옥상에 있는 십여 개의 굴뚝은 각각 다른 재료들을 사용해서 자연의 일부 같거나 혹은 추상적인 형태를 하고 있어서 마치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기다리는 우주인 같은 분위기다.
그런데 그런 거 다 제치고 나 같은 만년 주부는 ‘청소’부터 걱정이다. 이렇게 크면 청소를 어떻게 다 하누?? 나더러 살라는 것도 아닌데 남의 집 구경 와서 주부 모드가 돼버리다니. 너무 오래 현모양처 주부에 ‘집착(집 껌딱지)’했던 거다.
그의 철학과 종교, 이상이 조화롭게 재현된 저택 안에서 한참 앉아서 쉬었다. 각각의 방에 어떤 가구들을 얼마만큼 어떻게 배치했는지에 따라서도 분위기가 다를 텐데, 지금은 박물관처럼 구경 당하느라 저택 앞 오래된 건물들처럼 빨래가 펄럭이며 널려있지도 화분이 걸려있지도 않아 일상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집들 속에 기품 있고 고고하게 이웃하고 있다.
람블라스 거리 사이사이에 가우디의 작품 말고도 미로의 바닥화, 카날레테스(수도: 사람들의 미팅 포인트이면서 여기서 물을 함께 마시면 바르셀로나에 다시 온다는 전설이 있다), 호세프의 우산과 용 조각 건물(당시 우산 가게는 현재 은행으로 쓰인다), 가로등(청동 투구 장식)들이 숨겨둔 보물을 찾는 것 같다. 거리 화가들의 캐리커처 그리기, 특별한 캐릭터로 분장한 사람들의 퍼포먼스도 볼 만한 구경거리다. 스페인의 유명 셰프들이 애용하며 바르셀로나 식당들의 식재료를 담당했다는 보케리아 시장은 규모가 상당하다. 시장의 분주함, 생생한 삶이 살아 움직이는 곳이다.
포루토에서 못 탄 유람선을 여기 와서야 타봤다. 포루토가 강을 끼고 양편에 중세 이후 유적들과 건물들을 잘 간직한 추억과 역사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았다면, 여기 바르셀로나는 현대와 중세가 동시에 이물감을 주면서 공존하고 있는 느낌이다. 날카로운듯 유연하게 바다에 떠 있는 현대적 호텔 건축물을 보면서 ‘과연 몇 천 년 후에 후손들은 이 건축물들을 입 벌리고 감탄하며 바라볼까? 지구 상에 남아있는 21세기의 기계들과 자동차들을 신기해하며 찾아다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동시대의 것들보다 수천 년 과거의 잔재들이 상상력을 더욱 자극하고 희소성에 더 끌리는 게 인지상정이니.
대성당을 기준으로 바라보며 돌아오는 길에 들어선 고딕지구는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올 만한 미로 같은 골목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어둑해지기도 하고 5층 정도의 건물 사이가 한두 사람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 서로 그림자를 드리워서 으스스하기도 했다. 뭔가 숨어있을 듯한 그런 뒷골목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골목을 끼고 건물 1층엔 대부분 식당, 카페, 다양하고 개성 있는 가게가 현란하지 않게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고 있었다. 조용히 끊이지 않는 삶과 생활이 이어지는 신비한 매력이 가득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