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8일
어제 아침에 한글학교에 다녀온 남편의 안색이 안 좋았다. 공황이 왔구나, 싶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게 긴장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싶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전 내 애를 보고 집안일을 하면서 나도 피곤한 상태라 크게 신경쓰기보다 그냥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애랑 같이 놀고 먹이고 치우고 하다보니 금새 오후가 되었다. 방에서 나온 남편이, 미안하다고 당시 자기 상태를 설명했다. 듣고싶지 않았다. 알겠다고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거듭 미안하다고 하는데 지겨운 마음이 들었다. 남편 숨이 가빠보이는게 걱정되었지만 애도 울었다. 괜찮으니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애를 안방에서 재우고 나도 침대에서 낮잠을 자고 싶었지만 쉬고있는 남편에게 더욱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애는 거실에서 재우고 나도 쇼파에 누웠다. 불편했다. 안방문을 열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출산직후 갑자기 찾아왔던 공황을 경험하고나니 그 끔찍함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걸 저 문 너머에서 혼자 다스리고 있는 남편이 걱정되었지만 혼자 육아와 집안일을 하고 있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괜찮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쉬고 싶었다.
밤에 애는 9시 반, 2시 반, 6시 반, 11시에 깼다. 수면제를 먹고 잠든 남편은 깨지 않았다. 애를 먹이고 트림시키고 기저귀 갈고 다시 재우는 걸 네 번 하고 나니 점심께였다. 배가 고팠다. 좀 회복이 된건지 남편이 나보고 푹 자라면서 애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오겠다고 나갔다. 덕분에 세시간정도 푹 잤다. 자고 일어나니 추로스를 사왔다며 먹으라고 줬다. 신나서 주방으로 갔는데 어제 저녁먹고 안 치우고 쌓아둔 냄비며 후라이팬이 싱크대에 있고, 발바닥에 까끌까끌한 먼지들이 밟혔다. 무시하고 식탁에 앉았는데 백일잔치하고 아직도 치우지 못한 잡동사니들과 지저분한 바닥이 눈에 밟혔다.
나는 급하게 먹는거 진짜 싫은데 추로스를 급하게 먹었다. 그리고 집안 청소를 시작했는데 남편이 그냥 천천히 먹고 이따 같이하게 두라고 했다. 화가 났다. 너는 이게 거슬리지도 않냐고 쏴붙이고 싶었는데 애가 들을까 참았다. 애는 깔깔거리며 지아빠랑 노는데 그래 너네님들 팔자도 좋다 싶었다. 신경질적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할거 찾아 해라, 라는 마음 반 적어도 청소하는 동안 애나 제대로 봐라. 라는 마음 반이었다. 청소에 몰두했다. 집안정리가 되어갈 때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안방문을 벌컥 열었다. 애랑 남편이 자고 있었다.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은 언제나 나에게 안도감과 평온을 가져다 준다. 잠든 천사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미소짓는데 내새끼 옆에 누운 아저씨의 숨소리가 얄미웠다. 깨울까 하다가 청소는 이미 끝났고 뭐하러 싶어 내버려 두고 방을 나왔다.
깨끗해진 주방에서 남은 김치볶음밥과 취나물을 데우고 어제 냉장고에 넣어둔 소고기무국에 물을 조금 더 붓고 끓이기 시작했다. 냄비 뚜껑을 들고 싱크대에 놓으려다 손목에 힘이 빠져서 놓쳤다. 유리로 된 냄비뚜껑이 깨졌다. 손가락이 찔려서 아주 조금 피가 났는데 괜히 서러웠다. 몸이 만신창이가 된 것 같았다. 피곤한데 배고픈 나도 싫고. 먹고살겠다고 움직이는데 뜻대로 안되니 짜증이 올라왔다. 남편때문에 냄비뚜껑을 놓친것만 같았다.
고무장갑을 끼고 유리 파편을 조심조심 치웠다. 데워진 밥을 먹었다. 밥이 다떨어졌으니 다시 해서 냉동해둬야 하는데 움직이기 싫었다.
<지금 해야 하는 것을 해두는가 vs 단 삼십분이라도 쉴 수 있는 지금 쉬어 두는가>는 육아의 첫순간부터 지금까지 매일 여러번 고민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지만, 양 쪽 다 경험해 본 결과 둘 다 짜증스러운 결과가 나타난다. 어느 쪽도 옳거나 맞지 않다. 둘 다 별론데 그냥 그때그때 내 컨디션에 맞춰서 움직이는 것 뿐이다. 지금 짬이 났으니 세탁기도 얼른 돌려두고 쪽쪽이도 씻어 소독해두고 나 샤워도 하고 욕실청소도 좀 해두는 것은 체력을 팔아 안정감을 사는 행위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야할 일을 얼른얼른 해봤자 제대로 되지도 않고 다 끝나지도 않으며 속이 개운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애가 자니까 나도 얼른 자두자 라고 자는 것은 개운한 몸으로 스트레스받기를 선택하는 행위이다. 역시 이쪽도 그렇게 제대로 쉬는 것도 아니고 잘 수 있다고 잠이 든다는 보장이 있는것도 아니며 깨어나면 더러움속 자괴감이 든다.
나는 전자를 더 많이 선택하게 된다. 눈에 거슬리는 거라도 좀 치워놓고, 밥이라도 잘 챙겨먹으면 잠이 좀 부족해도 어떻게든 버텨지는데. 잠은 잤어도 아침점심 다 거르고 저녁에 급히 먹을 것도 없어서 피자나 시켜먹고 늦은밤에 집안일 하고 있으면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잠도 깊이 못잔다. 이런 때는 내가 두 명이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남편이 나와 같이 내내 움직여 주길 바라는데 출근은 해야하고 다녀오면 씻어야 하는 것이다. 다녀와서 내 밥을 뚝딱 차려줬으면 좋겠는데 쟤는 소고기무국을 끓일 줄 모르는 것이다.
적어두고나니 그냥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다 그렇다. 다 적어보고 말해보면 그냥 다 그럴 수 있는 일이다. 마음이 좀 홀가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