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만두야 Jan 19. 2023

어느 날 서른이 되었지만

꽃이라 하였다

서른이 되었다. 누구나 한 번쯤 맞이하는 서른. 의미를 부여하기 딱 좋은 서른. 이십 대 내내 나이에 민감한 편이었던 나는 한 살 한 살 서른에 가까워질수록 불안했다. 그런데 서른이 되니, 만으로 스물여덟이니까 그냥 스물여덟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게 그냥 내 마음에 좀 더 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6월부터는 스물여덟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12월에 생일을 보내고 한 달 뒤에 또 한 살을 먹는다는 게 항상 탐탁지 않았던 나는 만 나이로 통용된다는 정부의 정책이 마음에 들었다. 모르겠다. 다 떠나서 겉으로는 한국나이로 서른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스물여덟인 게 기분도 좋고 마음도 가벼웠다. 철이 없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사실 서른 인 나의 모습이 내가 상상해 왔던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기대했던 서른 살의 내 모습이 아닌걸.


서른을 너무 기대했다. 일단 스물아홉에서 서른을 마주하는 마지막 주에는 비행기를 타고 멀리 외국으로 떠났어야 했다. 그동안의 보상으로 연말에 연차를 쓰고 뉴욕의 타임스퀘어에서 카운트다운을 하거나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반짝거리는 조명과 수많은 인파 속 연말 분위기를 느껴야 했다. 그리고 새해 첫날 이국적인 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새해 소망을 빌어야 한다. 그런 연말 연초를 보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과 2년 전인 스물여덟까지만 해도, 사실 난 서른이 되면 내가 뭐라도 하나 하고 있을 줄 알았다. 서른이 되면 직장에서 인정받는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거나, 결혼을 하여 독립을 했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결혼을 약속하거나, 부모님께 효도를 하거나 그중 하나는 당연히 할거 같았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스물아홉에 다시 학생이 되었고 옆에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누군가도 있지 않다. 이렇게 될 줄 내가 알았나. 서른이 되기 딱 한 달 전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생일이 하루 차이나는 소울메이트 같은 언니와 그런 얘기를 했다. "언니 서른이 막상 되면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더 좋다고 하드라. 불안하지 않고 더 안정된 느낌이래. 나도 서른 되면 그러겠지?" "만두야 너 서른 되려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서른 된다고 바로 그렇게 되는 게 말이 되니?" 나도 내가 한 말이 웃기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언니와 한동안 웃었다. 아마 스물아홉이 나에게 있어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왜 그렇게 서른이 커 보였을까? 서점에 가도 브런치에도 제목이 서른이 들어간 책과 글들이 꽤 많다. 막상 1월 1일이 되고 나니 나는 12월 31일의 나와 다른 점은 없었다. 그게 당연한 거지만. 그런데 조금 마음이 안정된 느낌이긴 한 거 같다. 나의 이십 대를 돌이켜보면 너무 불안했고 막연했고 조급했던 거 같아서 막상 내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상상만 해왔던 서른이 되어보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게 아닌가 싶다. 서른이 별게 아닌 거 같아서. 한국나이로 서른이 되었는데, 내가 그토록 동경했던 서른 살의 내가 되어있는데 내가 별게 아닌 거 같아서. 서른이 되었을 때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어 있으려면 스물아홉의 나는 회사를 나오면 안 되었고 대학원에 들어가지 않아야 했다. 그렇다. 나는 스물아홉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 학생의 신분으로 다시 공부를 하고 있다. 회사가 아닌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 비록 아직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막연함이 날 두렵게 하지만 나의 삼십 대를 좀 더 빛나게 보내기 위해 더 성장하기 위해 이십 대의 마지막 해에 커리어가 아닌 공부를 선택했고 다시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 동기를 만났다. 오랜만에 신촌에서 둘이 만나기로 했는데 퇴근 시간이라 차가 막혔던지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와 역 앞에서 기다렸다. 오랜만에 신촌에서 친구를 만나서 그런지 설레기도 하고 기대도 되어 기다리는 동안에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멀리 역 계단을 올라오는 그녀가 보인다. 손에 예쁜 노란 꽃을 들고 있다. 그런데 활짝 웃으며 나한테 오더니 그 예쁜 노란 꽃 두 송이를 나한테 안겨준다. 뜻밖의 꽃이라서 놀랐는데 기분 전환할 겸, 축하할 겸 날 생각하며 꽃을 사 왔다고 한다. 내가 노란색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고 노란 꽃을 사 왔는지 기분이 좋아서 재잘재잘 깔깔 웃으며 신촌 골목길을 누볐다. 추운 날이었는데도 추운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 후 식당에서 두세 시간 동안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동안의 얘기, 고민들을 한껏 풀어놓았다. 서로 다른 길을 살아가지만 만나면 얘기할 게 어찌나 많은지. 얘기하다가 중간에 꽃을 보면서 꽃 너무 고맙다고 하는데, 내가 꽃이란다. 그런 말을 어떻게 하는지. 그녀는 학교 때 전공으로 석사 졸업을 하고 전업 작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스물아홉에 결혼을 했다. 작년 퇴사 하기 전 그녀의 결혼식을 갔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대학 동기 중 첫 번째 결혼식이었다. 아쉽게 헤어지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행복하다 했던 친구의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마음이 너무 따뜻해져서 생각이 난다. 항상 악착같이 학교 생활하던 그녀가 결혼하고 요즘이 가장 행복하다고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고 저녁에는 남편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서로의 얘기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말하는 친구의 표정에 나도 마음이 따스해졌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을 하니 나도 마음이 너무 좋다. 새해가 돼서 받은 노란 튤립 두 송이, 네가 나한테 항상 꽃이야.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항상 같이 붙어 다니며 비슷한 라이프 사이클로 지내왔던 친구들이 이제는 각자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길을 걷고 있다. 같은 전공을 했는데 졸업 후의 모습들은 너무나 달라서 때론 외롭기도 하다. 특히 서른이 된 우리는 서로 다른 거 같아서. 살아가는 모양도 마음의 모양도 가끔은 서로 달라지는 거 같아 비슷했던 과거가 그립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보다 내 이십 대를 잘 알고 나 자체를 사랑해 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어서, 나보고 꽃이라고 말해주는 친구도 있어서 서른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거 같다는 기분이 든다. 아차 어차피 스물여덟이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꽃을 안겨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그리고 꽃처럼 활짝 피어내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 할아버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