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창: 소리를 볼 수 있다면,
아홉살 무렵 첫 안경 처방을 해주시던 의사선생님은 시력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말했었다. 성장기에는 몸이 자라는 속도와 맞물려 시력도 나빠진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나의 성장속도는 상당히 빨랐고, 시력도 급격히 나빠졌다. 그리고 곧 시력 보조 기구 없이는 일상 생활이 많이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나를 보러 오시는 길이었다. 자전거를 신이나게 타고 오시던 할아버지는 큰 트럭과 사고가 났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으나 사고 후유증은 할아버지의 시력을 차차 앗아갔다. 아빠는 할아버지와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사이였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엄마가 막 시집와서 만난 시아버지로서의 내 할아버지, 그리고 내 유년시절 내내 좁은 방안에 누워계시던 할아버지 딱 두가지 이다. 대단한 끽연가이셨던 할아버지의 유일한 낙은 자식들이 사다주는 담배 그 한 가지 뿐이었다. 덕분에 할아버지의 좁은 방은 언제나 담배 연기가 그득했고, 벽지는 다시 붙여도 금새 황갈색으로 변해있었다. 말씀도 거의 없으셨던 무뚝뚝한 성격에, 앞도 보이지 않고, 종일 누워있다가 잠시 앉을 때에는 흡연만 하시다보니 할아버지 방에 오래 앉아있는 가족이 많지 않았었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죄책감 같은 걸 마음에 품었다. 이 모든 상황이 나를 보러 오시는 길에 벌어진 사고로 인한 것이란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무렵에 할아버지는 아예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되셨다. 그 즈음에는 나도 안경 렌즈가 너무 두꺼워져 렌즈로 바꿀 것을 권유받을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다.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들이 당연하게 일어나지 않게 되는 상황은 당혹감을 수반하며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때로는 하나씩, 대부분은 모든 것이 한꺼번에 휩쓸고 지나가는 것과 다름없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그 상황을 참으로 끔찍하게 상상하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때에는 그 끔찍함을 견딜 수 없어서, 입관에서 발인까지 마치 갈비뼈가 심장을 눌러 찢어버리도록 울어제꼈다. 사연을 모르는 조문객들은 손녀딸이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이만큼 슬퍼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들 말했다. 내가 견디기 힘들었던 가장 큰 공포는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그 '암흑', 무서운 일이 생길 것 같은 '불안'이었다. 할아버지의 빈 방에는 할아버지가 입고 계시던 옷, 누워계시던 이부자리, 방안 곳곳에 담배재가 채 타기 전에 떨어져 만든 흔적들이 그득했다. 돌아가시기 전 몇 년은 말 그대로 칠흙 같은 '암흑'에서 숨을 쉬고 계셨던 것이다.
2009년 초봄에 이 그림을 덕수궁 미술관"에서 처음 마주했을때, 아주 짧은 첫 순간 그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나지 않아, 내 갈비뼈가 눌렀던 심장의 언저리를 저 학들이 날아와 감싸 안는 것 같았다. '아악의 리듬', 귀로 들어야하는 리듬과 소리를 눈으로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수 분이나 그림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이후 내내, 한국의 그림 중에서 좋아하는 그림을 꼽으라는 질문을 받으면 '김기창' 이라는 작가를 떠올린다. 상당히 다작을 하셨던 작가인데다 모두가 아는 그림을 그린 장본인이신데 (그는 만원권 앞면의 세종대왕 어진을 그렸다.), 의외로 그의 이름 석자를 정확히 알고 있는 한국인이 드물다는 사실이 나는 서글퍼서 더 많이 언급하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가 어린시절 청력을 잃었다는 사실에 내가 아주 어쭙잖은 동정을 보내는지도..
'아악의 리듬'을 만나자마자 나는 김기창 이라는 화가에 무섭게 빠져들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을 10년 단위로 묶어 머릿속에 배열해보자, 그의 이름 앞에 붙는 천재화가 라는 수식어에 별을 백만개라도 달고 싶어졌다. '이건희 컬렉션'의 첫 공개 전시회에서는 전시브로슈어 전면에 배치되었던 전시 대표 작품 보다는, 김기창의 군마도를 다시 보려고 불굴의 광클릭을 반복하기도 했었다. 김기창 화백의 그림들에 대한민국 근현대 회화 역사가 녹아있다면, 그의 아내 박래현 화백의 작품들에는 그 달라지는 역사들의 포문을 열었던 열쇠가 숨겨져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오랜 기간, 나의 의지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로 서양화만 동경해오다, 그의 그림들을 통해 비로소 한국화에 대한 갈증까지 해소한 셈이었다.
한번씩 이 그림이 생각나서 찾아볼때면, 아주 단순한 호기심이 나의 오감을 지배해 버린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데, 소리의 느낌을 어떻게 알고 눈에 보이도록 그림으로 그려냈을까. 그리고 나는 평소 유난한 내 오감이 단순해 지는 이 순간이 참 편안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