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nda Ko Mar 16. 2021

다시 또 만나요

제주 서쪽 게스트하우스, 스테이 늘랑


제주의 동쪽은 익숙하고 편한 곳이라면 서쪽은 내게 낯설고도 새로운 곳이다. 그래서 가끔 서쪽을 가면 제주가 아닌 다른 섬에 또 와 있다는 느낌을 받고 한다. 제주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동쪽을 갈지 서쪽을 갈지 늘 고민하는데 이번엔 큰 맘먹고 새로운 곳을 가보기로 했다. 주로 가고 싶은 카페와 식당의 동선이 어느 정도 정해진 다음 숙소를 정하는데 감성적인 공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나만의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있는 그런 곳. 삼십 대가 된 지금도 부모님과 같이 살다 보니 여행 때만큼은 조용한 곳에서의 혼자만의 시간을 꿈꾸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 서쪽 여정의 하루는 독채에서 나머지 이틀은 평소 가고 싶었던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기로 했다.


한경면 판포리라는 조용한 마을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 시골집 분위기 물씬 느껴지는 집 외관을 들어서니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오후 4시, 여행객들이 들어오기엔 이른 시간이다 보니 처음 온 공간에 나 혼자였다. 천천히 내가 지낼 방을 둘러봤다. 오, 아늑하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니 주인장의 책 취향이 왠지 나와 비슷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많았다. 책장 옆에는 그림을 그리기 좋을 책상과 여유로운 옷걸이 까지. 사실 제일 만족스러웠던 건 전기장판! 추위를 많이 타는 나 같은 손님을 위한 사장님의 배려가 느껴졌다.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니 다른 방에 머무는 여행자들도 만날 수 있었고 서로 어색한 눈인사를 나눴다.

게스트 하우스가 재밌는 건, 함께 쓰는 공간이라 소등시간이 있다. 그래서 자기 전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누가 먼저 씻으러 갈지 미묘한 눈치게임이 벌어지곤 하는데 가끔 순서를 놓쳐서 괜스레 민망해질 때도 있다. 그러다 잘 준비를 다 마치고 거실 테이블에 한 두 명 모여 앉아 이야기가 시작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런저런 이야기로 금방 친해지곤 한다. 스테이늘랑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랬다. 나보다 며칠 전에 들어와 이미 게스트하우스에 완벽히 적응한 여행자들이 있었다. 먼저 앞면을 튼 여행자들끼리 얘기를 나누고 있어서 은근슬쩍 나도 그 자리에 앉았다.


“저도 혹시 같이 앉아서 이야기 나눠도 될까요?”

-“그럼요, 아이스크림도 같이 드실래요?” 라며 지금 막 냉장고에서 꺼낸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며 흔쾌히 옆자리를 내주었다.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던 사람들 중 두 사람이 유독 닮은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자매였다. 친 자매가 아닌 사촌 지간인데 서로 너무 여행을 좋아해서 함께 여행을 한다고 했다. 해외여행이 아닌 국내여행인데 캐리어 대신 배낭을 메고 온 걸 보고 찐(진짜) 여행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을 들고 이동하기 어려울 것 같아 숙소는 여기에서만 지내기로 했단다. 호감으로 느껴지는 두 사람의 소탈한 모습이 사촌 자매라 더 부럽기도 했다. 내게도 친언니 같은 사촌언니가 있는데 함께 여행을 못한 게 아쉽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우리는 서로의 지난 여행으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세계 여러 곳곳을 여행했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한참 듣다 보니 나와도 결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자매와 나의 여행지가 거의 겹치지 않아서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삽시간에 세계여행을 한 것처럼 재밌었다.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여행할 그 날이 온다면, 함께 여행 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는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새로운 곳에서 이렇게 단 몇 시간 만에 친해질 수 있다니, 잊지 못할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8시, 아침마다 뭉그적거리는 내가 저절로 눈이 떠질 만큼 한 번에 일어났다. 따로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도 될 거라며 전날 밤 사장님의 조언을 듣기 잘했다 생각이 들었다. 잔잔한 음악소리와 함께 부엌에서부터 전해지는 고소한 빵 냄새와 커피 향기. 마다할 이유 없는 모닝 알람이었다. 얼른 준비하고 정성껏 차려 주신 조식을 먹으러 자리에 앉았다. 역시 제일 좋은 건 남이 차려준 밥상이지만 아침부터 이리도 맛있는 한 끼라니!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빵이 어찌나 맛있던지, 매번 직접 만드신다는 사장님 표 빵에 감동했다. 그리고 내려주신 커피까지도.


식사를 끝내고 오늘은 어딜 갈지 고민하고 있는데 혹시 귤 따기 체험하고 싶냐고 사장님께서 내게 물으셨다. 가을에 제주의 귤이 정말 맛있어서 직접 한번 꼭 따고 싶었는데 내 속마음을 어찌 아셨는지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전날 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두 자매도 함께 갔다.


도착하자마자 달큼한 귤 냄새가 코 끝에 맴돈다. 장갑을 끼고 바구니를 챙기면서 벌써 신이 났다. 사장님은 바닥에 떨어진 귤이 많은 나무일수록 아직 떨어지지 않은 귤이 잘 익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천천히 신중하게 귤을 딸 나무를 고른 후, 즐거운 귤 따기를 위한 노동요를 선곡했다. 한껏 흥이 오른 채로 귤을 따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직접 딴 귤을 받을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귤을 따는 행복감도 만끽하면서 말이다. 어느덧 귤 따기가 몸에 익숙해질 무렵, 재미로 귤을 따러 왔다가 한 시간 만에 귤 3박스를 땄다. 노동요의 효과였을까, 혼자서 따온 귤을 보고 여태껏 온 손님 중에 역대급으로 일을 잘한다고 한참을 웃으시던 사장님. 하하, 노동의 뿌듯함과 왠지 모를 민망함속에 같이 웃었다. 11월이었는데 등에 땀이 날 정도니, 정말 집중했나 보다. 신기하게도 오랜만의 단순노동으로 몸과 마음이 개운해졌다. 사람은 역시 땀을 흘려야 살아있다는 걸 느끼나 보다.



스테이 늘랑에서 이틀의 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다. 한번 왔던 여행객들이 감사하게도 다시 와줄 때가 많다는 사장님의 얘기가 왜 인지 알 것만 같았던 마지막 날. 다시 또 왔을 때 지금처럼 그대로 머물러 있어 주길 바라며 “다시 또 만나요”라는 인사로 대신 아쉬움을 달랬다.




작가의 이전글 어떤 집을 찾으시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