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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유월 Apr 23. 2022

강남에서 시골로 전학을 갔다

나는 강남에서 나고 자랐다.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학교, 학원, 집을 뺑뺑이 돌던 기억만 남는다. 세어보면 대략 7가지의 학원을 다녔다. 영어, 수학, 암산, 웅변, 리듬체조, 피아노, 수영 등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꽤나 자녀의 사교육에 진심이었던 것 같다.


당시 우리 가족은 삼성동 차관아파트에 살았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의 나는 리듬체조 학원이 끝나면 체조복을 입고 밤마다 아파트 단지 안을 뛰어다녔다. 손을 위아래로 흔들면 리본이 밤하늘에서 차르르하고 찰랑거리는 모습이 아름다워 좋았다.


수학, 영어, 암산 학원에서 뭘 배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어렸던 나에게 고통스러웠던 순간은 여전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한겨울 수영이 끝나고 머리카락이 젖은 채 오들오들 떨며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시간, 피아노 학원 맨 끝방에서 악보와 따로 노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숨죽여 울었던 시간들이다.


노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당시 동네 친구와 놀이터에서 한참 소꿉놀이도 하고, 옆자리 친구가 빌려준 드래곤볼을 처음 보고 만화의 세계에 발을 디디기도 했다. 드래곤볼이 너무 재밌어 집 앞의 만화방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용돈을 탕진하고 나면 아빠, 엄마의 겉옷 주머니에 동전이 있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이어질 것 같던 강남에서의 삶은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 막을 내렸다. 동생이 폐렴으로 아프기도 했고, 아빠의 로망이었던 전원생활을 위해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로 전학가게 된 것이다. 포천의 한 한적인 마을이었다. 저수지가 보이고 농부들이 밭을 일구는 정말 시골이었다.


우리가 살게 된 집은 너무나 좋았다. 근사한 이층 집이었다. 아빠가 보유했던 땅 위에 우리 명의로 지어진 집이었다. 내 방은 산과 들이 보이는 이층에 위치한 방이었다. 집이 너무 좋아 폴짝폴짝 뛰었다. 내 방은 물론 동생 두 명에게도 각자의 방이 생겼다. 하지만 강남에서의 삶과 시골에서의 삶은 180도 달랐다. 전원생활의 환상이 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새로운 학교로 전학 간 첫날. 나는 별세계에 떨어진 듯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강남에서는 한 학년에 총 8개 반이 있었다. 그만큼 아이들도 많았고 활기찬 느낌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학교는 아이들이 적어 한 반을 20명씩 A, B반 두 개로 쪼개 놓았다. 심지어 반 중앙에 칸막이 같은걸 설치해 반을 나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문방구였다. 겉모습은 한옥인데 지붕의 기왓장은 대부분 부서지고 거의 다 쓰러져가고 있었다. 그 안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 학용품이나 불량식품을 사 먹는 모습을 한참을 멍하니 서서 바라봤다. “내가 지금 무슨 상황에 처한 거지…?”라는 초조함이 몰려왔다.


시골 아이들은 강남에서 전학 온 나를 신기해했다. 서로 내 팔짱을 끼려고 내 주변을 빙그르르 에워쌌다. 나에 대한 환상은 금세 깨졌지만 말이다. 인기녀에서 갑자기 한 달간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려서였는지 반 아이들과는 금방 친구가 됐다.


별세계 같았던 주변 세상은 한 달도 안돼 적응이 됐다. 어렸기에 가능했다. 학교에서 걸어서 집까지 1시간 30분이 걸렸지만, 동생 손을 붙잡고 이 거리를 걸어 다녔다. 전학 후 3주간은 아빠가 데려다줬지만, 이내 우리끼리 다녀야 하는 순간이 왔다. 버스 운행시간이 너무 길어 버스를 기다릴 수도 없었다.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도 학교와 집 거리가 우리 집이 가장 멀었다.


그렇게 5년을 시골에서 보냈다. 그리고 다시 강남으로 전학을 갔다. 나는 다시 별세계에 떨어졌다. 내 유년시절의 기억은 너무 강력해 내 안에 커다란 흔적들을 남겼다. 그 흔적들을 앞으로 하나하나 꺼내보려고 한다. 36살이 된 내가 유년시절을 되짚어보며 그때와 지금의 나를 어루만져보고자 한다. 그 여정을 함께해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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