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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로 Nov 21. 2023

나의 포용력은 어디서 왔을까?

이별을 통해 삶을 제대로 사는 방법을 깨닫다


벌써 수능이 끝났다. 수능만 되면 날이 추워지는 건 국룰이라지만 내가 수능을 치던 해는 유난히 더 추웠다.




수능을 마치고 나서 마중 나온 아버지께서 할머니가 많이 아프시다는 얘기를 해주셨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나는 우리 가족 중에서 그 누구보다 각별한 사이였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갓난쟁이 시절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으니까.




할머니와 지내면서 내가 할머니 마음을 쓰리게 했던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1.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는 낡은 가죽 지갑             



아 응애예요!



태어나자마자 대부분의 시간을 할머니의 돌봄을 받고 자랐지만, 내가 의사소통 및 통제가 가능한 시기가 되자, 부모님께서는 종종 나를 집에 데려가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래도 새로운 환경이 더 좋았던 모양인 6살 즈음의 나는 할머니네서 밤중에 생떼를 피우기 시작했다.



"나 엄마아빠한테 갈래요 할머니 "



어린 내가 부모님네 가서 자고 싶다고 생떼를 피고 울자 할머니께서는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검은색에 낡은 가죽 지갑을 꺼내드시고는, 지퍼를 찍- 하고 열었다.



낡은 지갑에서 잔뜩 구겨진 삼천 원을 딱 꺼내서 내 꼬까손에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 이걸로 내일 과자 사 먹게 해 줄 테니까. 이제 그만 울고 자거라 "




6살의 철이 없던 나는 다음날 과자를 사 먹을 생각에 신나서 잔뜩 나서 손에 삼천 원을 꼭 쥐고 잠에 들었다.  




성인이 된 나는 그 잔뜩 구겨진 삼천 원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




속상했을 마음을 꾹 꾹 눌러 담아 꺼냈을 그녀의 구겨진 마음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사무치게 미어진다.




시장에서 동네 할머님들이 검은색 인조가죽 지갑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이 날이 떠오르곤 한다.








2. 그놈의 치킨...




유치원을 졸업하고, 부모님네서 초, 중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부모님은 교육 문제로 인천에서 김포로 이사를 가셨다.




교육 문제를 고려하게 한 장본인인 똑똑한 내 동생은 군말 없이 김포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반골기질이 있던 나는 기존에 다니던 인천의 고등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인천의 학교를 다니기 위해 다시 할머니집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 나는 대단한 치킨 러버였다.



당시 가장 좋아했던 치킨은 BBQ 후라이드 치킨이었다. 고등학생이던 나에게는 치킨 값이 굉장히 비쌌기 때문에 혼자서는 절대 사 먹을 수 없었고,



BBQ 치킨을 먹기 위해서는 친구 네다섯 명이 모였을 때나 시켜 먹을 수 있었다.





그때 즈음 작은아버지께서 BBQ 치킨 가맹점을 운영하기 시작하시면서 종종 할머니와도 치킨을 나눠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날도 공부를 하다가 잠에 들어있는데, 할머니께서 나를 깨우시며 너 좋아하는 치킨을 사 왔다며 먹으라고 말씀을 하셨다.





잘 자고 있는데 갑자기 깨서 어안이 벙벙했지만, 치킨을 먹기 위해 '기껏' 깨고 나서 보니 내 앞에는 '보드람 치킨'이 놓여있었다.





11년도쯤엔 '보드람' 치킨이 갓 생기고 있던 추세였는데, 어린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른들이 맥주랑 같이 먹는 치킨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나는 튀김옷이 많은 치킨을 좋아했던 터라..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 아 이 치킨은 내가 안 좋아하는 치킨인데,,,"





인상을 팍 쓰며 할머니께 짜증을 내자, 할머니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그래도 먹어보면 맛있다고 내 앞에서 먼저 맛있게 먹는 시늉을 하셨다.





철이 없던 나는 할머니가 먹으니까 어쩔 수 없이 먹는다는 투로 계속 투덜대며 치킨을 먹었다.





이윽고 할머니는 맛없는 치킨을 사 와서 미안하다고 나에게 사과를 하셨다.  그런 말을 바라고 투덜거린 건 아니었는데..  




괜스레 죄송해진 마음에 나는 말없이 치킨을 끝까지 맛있게 먹었다.







3. 돌덩이를 내려놓다.





이 두 가지 사건이 할머니와 지내면서 내가 유일하게 할머니께 짜증을 냈던 사건이다.




내가 고3이 되던 해, 그러니까 할머니와 다시 같이 살게 된 지 정확히 3년이 되던 해에 에 두 가지 돌덩이를 마음에 담아만 두고 있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을 잡고 할머니께 이 두 가지 사건을 기억하시냐고 물어보았다.





" 그때는 제가 진짜 철이 없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할머니 죄송해요 "



" 너랑 나는 참 인연이 깊지. 내 첫 손주라서 참 이뻤고, 뭐든 해주고 싶은 아이였어. 지금도 나는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할 곳이 너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우리 둘끼리 의지를 해야 세상을 버틸 수 있는 거야.그러니까 속상하고, 화나는 게 있으면 서로 말하면서 털어내면 된다. 서로 잘 보듬어주면서 이렇게 지내면 되는 거야 "



할머니께서는 뭘 그런 일을 마음에 담아두냐고, 본인도 일이 잘 안 풀리고 그랬을 때 나한테 화냈던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사과란 참 별게 아닌데 나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머쓱하고 힘들 때가 있다. 그 '인정' '머쓱' 함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4. 포용력에 대해서





다시 수능날 아버지께서 할머니가 많이 아프다고, 시간이 많이 안 남은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시자마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주체적으로 마음에 걸리는 사건들을 해결했음에도 마음이 이렇게나 무너져 내리는데 ,,





'할머니의 시한부'라는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사과했다면 , 평생 나를 용서하지 못하며 살아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시기와 유통기한이 있다. 이 시기를 놓쳐 '외부적인 어떤 요인'이 발생하고 나서 사과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니다.





깊이 있는 사과는 사과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내가 주체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 '사과'는 나를 더 포용력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5. 서로를 위해주고 보듬어 주는 것





수능이 끝나고 나서는 할머니께서 계속 투병을 하셨고, 가족 중 시간이 가장 많이 남았던 내가 할머니 병간호를 하겠다고 자처했다.





친구들과 수능 이후 떠나기로 했던 내일로 여행도 급하게 취소했고, 다녔던 알바도 바로 관뒀다.





할머니를 병간호하는 약 8개월간 나는 할머니가 나에게 어렸을 때 해줬던 모든 것들을 할머님께 갚을 수 있었다.





6. 그놈의 치킨... 2




8개월간 쉬지 않고 병원의 할머니 자리 옆에 간병인 침대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가족들이 이제 잠깐 쉬라고 했고,





정말 잠깐 , 병원 근처 작은아버지네로 갔더니 가족들이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BBQ 치킨을 먹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치킨을 한입 베어 물었는데, 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할머니가 떠나셨다고..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였다.





입에 문 치킨을 다 씹기도 전에 서둘러 병원으로 갔고, 내가 탄 엘리베이터에는 심전도를 측정하는 기계를 들고 탄 담당자가 있었다.





제발 나랑 같은 층은 아니기를 바라보았지만, 그 심전도 측정기는 우리 할머니를 위한 기계가 맞았다.





그분은 나와 같이 할머니 병실로 들어갔고, 병실에서는 할머니가 생전 좋아하시던 불경이 틀어져있었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





불경소리와 함께, 심전도를 측정하기 시작했고, 의사가 와서 사망선고 일자를 말해주었다.





의사는 심장은 멈췄어어도 뇌는 조금 더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가족들에게 할머니에게 한 마디씩 하라고 했다.





다들 눈물만 훔치고, 말을 하지 않고 있기에 나는 할머니께 다가가서 엉엉 울면서 외쳤다.




" 할머니 그동안 저 키워주셔서 정말 진심으로 감사했어요. 저 다음에 태어나도 할머니 손녀로 태어날래요. 진심으로 사랑했고, 죄송했고 고마웠어요.... "




이렇게 내가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앞에 두 돌덩이를 내려놔보았을 때, 할머니와 나의 관계가 그리고 나의 내면이 확장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족들 앞에서 처절하게 울면서 소리칠 수 있는 경험이 몇이나 될까.




그게 부끄러워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데 말 한마디 못하는 건 절대 있어서 안 될 일이다.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것, 내가 받은 사랑을 다시 다 돌려줄 수 있었던 것 , 그리고 미안했던 것들은 모두 미안했다고 말한 것, 마지막 사랑한다는 인사까지



할머니와의 인연은 그렇게 나도 인지하지 못했지만 참 교과서적인 방법으로 잘 마무리되었다.







이 이후 나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후회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자 최선을 다한다.



설령 나에게 당장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일지언정 ,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면 늘 최선을 다하는 방향으로 애를 쓴다.



언제 어떤 방법으로 애정은 돌아오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우리 할머니와 내가 주고받았던 사랑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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