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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한범 Jul 18. 2019

실직, 항해를 하지 않는 항해사.

그린피스 항해사 썰#14

 "우리 배는 50일 동안 여기 카나리섬에서 머물 예정입니다.

 배의 수명을 결정짓는 50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박 수리에 '올인'할 예정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중요한 수리를 맡고 있는 엔지니어들


 아침 회의에서 나는 이 소리를 듣고 멍~해졌다. 이 말인즉슨, 나의 공식적인 일인 '항해'를 할 일이 없다는 소리였다. 당분간 나의 공식적인 일이 없다는 소리에 좋기도 했지만,

'그럼 나는 뭐해?'라는 생각과 함께 불안감이 엄습 해오기 시작하였다.


 누구의 일도 아닌 일은 나에게로...

 언제나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 아침 회의가 끝나자마자, 두 명이 동시에 나를 불렀다. 내가 '자유계약시장'에 나온 것을 알고, 서로 데려가 쓰기 위함이다. 그래도 쓰임이 없는 것보단 여기저기서 찾아 주는 게 좋을 거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항해가 아닌 여러 가지 일들을 맡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 직업, 소셜미디어 관리자.

 그린피스 선박에는 각각 페이스북 페이지와 인스타그램 페이지가 있다. 그리고 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은 아니지만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여러 가지 사진, 글 그리고 비디오 등을 포스팅한다. 그 관리자를 때론 선원이 맡기도 하는데, 지금은 '당연히' 나의 일이 되었다.


일하는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 언제나 휴대폰을 가지고 다녔다.

 나의 깊숙한 곳에서는 '관종'의 피가 흐르는 것인지, 이 일은 나와 매우 잘 맞는 것 같았다.

 '구독과 좋아요'는 이 일에 대한 엔돌핀이 되었고, 틈만 나면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떤 일에 관심을 가지는지 끊임없이 파악하려고 노력했고, 그 니즈를 충족시켜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 어디서 좋은 사진을 포착할 수 있을지 몰라 항상 휴대폰을 소지하고 다녔다.

 눈치 보지 않는, 떳떳한 '관종'의 삶이었다.

 아마 이때 눈 뜬 나의 본능이, 지금 나의 글을 꾸준히 연재하게 되는 힘이 아닐까 싶다.


 두 번째 직업, Garbologist (쓰레기 수거 작업자)

 2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생활하는 선박에서는 쓰레기가 꽤 많이 나온다. 우리는 자체적으로 그 양을 최대한 줄이고자 노력하고, 특히나 플라스틱과 같이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는 물질들을 최대한 피하고자 하지만, 쓰레기의 배출은 아직 불가피하다.

 또한, 배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 쓰레기 배출에 민감해하고, 분리수거를 철저하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쓰레기들을 다시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그리고 또 한 번 분리수거가 잘 되어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렇게 쓰레기를 차곡차곡 잘 모아서 버릴 때 한 번에 잘 버릴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Garbologist 임명식

 이 직업을 우리는 Garbologist라고 부르는데, 이 직업을 맡을때 특이한 의식을 한다. 쓰레기로 된 망토와 왕관을 쓰고, 임명을 받는 것이다. 하기 힘든 일들을 맡기는데, 약간의 유머를 넣어, 이왕 하는 거 재미있게 하자 라는 의미가 있지 않았나 싶다.


 세 번째 직업, 목수

 하루 일과 중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 목수일이다. 배에 필요한 자잘한 것들을 나무로 만들어야 했는데, 생전 거의 처음으로 나무로 만드는 일을 해 보는 것이라서, 많은 배움과 적응이 필요하였다. 여러 동료들이 많이 가르쳐 주었고, 여러 가지 팁을 전수해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튜브'의 도움이 컸다. 일과 시간이 끝나면, 매일 목공에 관련된 영상을 많이 봤다. 유튜브는 꽤나 훌륭한 스승이었고, 영상에서 본 내용들을 그다음 날 바로바로 적용해 볼 수 있어서 나의 실력은 빠르게 늘어갔다.

전기톱을 처음 사용해보는 초보 목수


 배의 가구나 물품들은 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이 많았고, 배의 공간에 맞게 '맞춤형 가구'등이 많이 필요했다. 또한 부러진 곳이나 수리할 곳이 많기도 하여, 나의 작업장은 쉴 새 없이 계속 돌아갔다. 그렇게 나무를 켤 때 나는 나무향기를 계속 맡아가며 배의 여러 곳을 고쳐 나가기 시작하였다.


 네 번째 직업, 식품 조달원

 그린피스 선박에서 소비되는 식품들은 매우 까다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다. 우선 채식 위주의 식단을 기본으로 하고, 팜유, GMO 식품 등을 먹지 않는다. 그리고 가능한 대량생산 제품을 피하고, 각 지역 농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노력한다.

 항해를 할 때에는 주로 주방장이 대부분의 음식들을 관리 하지만, 이렇게 정박을 오래 할 때에는 선원중 한 명이 도와, 최대한 각 지역의 로컬 식품 재료들을 '직접'구입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주변에 어떤 농장이나 로컬 재료들을 판매하는 곳이 있는지 조사하고, 그들과 직접 계약을 맺어 재료들을 조달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찾는다. 물론 한가한 내가 또 맡게 되었다.

 나는 여러 가지 방안을 물색하고, 직접 구입을 하러 다녔다. 예를 들어, 선박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최대한 이 지역 재료를 살려 만든 빵집이 있었는데, 새벽마다 일정한 양의 빵을 구입하기로 계약하여, 매일 신선한 빵을 먹을 수 있었다. 덕분에 새벽마다 자전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면서 의도하지 않은 새벽 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포장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창의적인 방식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식재료가 배달되면, 모든 선원들이 다 같이 운반하는 것이 전통이다.


 이 외에도, 여기 주변 사람들이 배가 궁금해 놀러 왔을 때 설명해 주는 '선내 가이드', 녹슨 철을 벗겨내는 '깡깡이', 벗겨낸 철위에 다시 페인트를 칠하는 '페인트공', 이동해야 할 때 차를 몰아주는 '드라이버', 선내 곳곳에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스티커와 그 자국을 때 내는 일 등...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게 일상이 되었다.

 덕분에 나의 일터인 브릿지(선교)에서의 일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다른 선원들은 무엇을 하는지 조금 더 디테일하게 알 수 있었다. 또한 매듭, 공구 사용, 페인트 배합과 같은 Sailor로서 갖춰야 할 자잘한 능력들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페인트는 배합이 중요하다. 잘못하면 마르지 않거나 칠할 수가 없다.

  이런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선원'이라면 당연히 알아야 할 것들을 모르고 '매너리즘'에 빠져 살아왔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나는 내 할 일만 하면서, '뭘 모르는지 모르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자만속에 빠져 살아왔다는 것도 느꼈다. 앞으로는 부디 내 주변을 돌아보고, 동료들에게 관심을 가지며, 지속적으로 배우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박의 구석구석, 세심한 것 까지 다 알고 이해하는 점이, 나를 미래의 좋은 선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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