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하다 가끔 마주하게 되는 개발노잼시기 극복법
슬럼프라고 해야 할까. 개발자로 살다 보면 문득 개발이 재미없고 싫어지는 시기가 오는 것 같다. “개발 노잼 시기”. 나도 그랬지만 주변에서도 참 많이 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기를 견디다 못해 기획 직군처럼 다른 직군으로 새 희망을 찾아 떠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개발에 대한 열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그냥 한 사람의 월급쟁이 직장인으로 사는 것 같다.
딱히 언제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5년 차 전후에 이런 개발 노잼시기가 크게 오는 것 같다고, 주변 사람들 기반으로 사이비 통계를 내본다. 빠르면 3년 보통 5년. 직장인 개발자로 살다 보면 한 번은 거치는 게 아닐까 싶은 개발 노잼 시기.
개발노잼시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정답은 없겠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가짜 꿈, 가짜 자신이 아닌 진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개발노잼시기를 극복(?)하는 데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만약 취업 초기부터, 혹은 3년을 다니지 않았는데도 개발이 노잼이라면 두 가지 옵션이 있겠다.
첫 번째 옵션. 빨리 도망쳐라. 지금 다니는 회사를 오래 다닐수록 여러분의 커리어 전환은 어려워진다. 나이가 30줄에 들어서면 신입으로 새 커리어를 시작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기회가 줄어든다. 어차피 개발 오래 한다고 다 PM이나 기획자로 갈 수 있는 것 아니다. PM도, 기획자도 전문 직군이다. PM을 잘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지식은 개발 지식이 아니라 PM으로서의 경험이다. 커리어를 전환하면서 내 경력을 그대로 인정받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어릴 때, 내 경력을 버려도 덜 아까울 때, 빨리 도망치자.
두 번째 옵션. 도망치는 게 썩 당기지 않는다면. 한번 개발을 깊이 파보자. 연차가 낮은데도 재미가 없다면, 어쩌면 재미있을 만큼 깊이 파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헬스장 2일차에 헬스가 재밌긴 쉽지 않다. 몇 달 정도 꾸준히 하면서 들어 올릴 수 있는 무게가 늘고, 변해가는 내 몸을 보게 돼야 비로소 재미가 붙지 않을까. 개발도 딱 헬스만큼만, 근육이 어느 정도 잡힐 때까지만 더 깊이 파보는거다. 어떤 분야든 분명 매력은 있고, 많은 경우 우리는 우리가 서툰 일로부터 도망치고 싶거나 노잼이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다.
개발자로 산다는 건 정말 끊임없이 새 기술이 나오고, 하나를 익혀두면 또 새로운 게 나온다. 그런가 하면 어느정도 숙달된 기술을 가질 시기가 되면 더 공부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지점도 온다. 보통 이 지점까지는 공부를 할수록 업무에도 크게 도움 되고 연봉도 오른다. 그런데 어느 정도 경험과 실력을 쌓고 나면 공부를 한다고 연봉이 비례해 상승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지점이 올 수 있다. 이미 핵심적인 건 알고 있고 평소 개발하는 데 지장은 없다. 더 공부하면 좋겠지만 그게 직접적으로 업무에 도움이 되진 않는다.
회사를 꽤 다녔고 이직도 한두 번 했다 보니 결국 회사는 다 똑같고, 결국 우린 모두 직장인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시키는 일을 해야 하는 처지고, 내가 하고 싶은 방향으로 개발하는 건 쉽지 않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들을 겪다 보니 어느새 개발에 질려 버린다.
주변에서 흔히 본 케이스인데, 이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기로는 이제는 ‘한 번뿐인 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잘 따져서 선택해야 할 것 같다.
모두가 구글의 제프 딘처럼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구글을 탄생시키고 키우는 것에 비할만한 원대한 꿈이 얼마든지 많다. 그중에 하나는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배우자와 화목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 자식을 정성 들여 키우는 것 역시 정말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한다. 만약 나의 인생 목표가 개발자로 큰 기여를 하는 게 아니라면, 과감히 놓아주는 것도 지혜라고 생각한다.
대신, 이렇게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목표를 명확히 인지했다면 빠르게 크고 안정적인 회사로 이직할 것을 권한다. 조금이라도 스스로의 능력이 시장에서 인정받을 때 말이다. 전통적 대기업들과 IT 대기업들은 안정적이고, 탁월한 복지를 제공한다. 꽤 많은 곳이 정년도 거의 보장된다. 육아휴직, 사내 어린이집이 잘 되어 있고, 학비 지원을 해주기도 한다. 그런 기업으로 이직해 인생의 본질적인 목표에 집중하면서 개발자가 아닌 직장인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
한편, 고민 끝에 좀 더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남았다면, 환경을 바꿔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매너리즘은 익숙함과 안락함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좀 더 위험하고, 도전적이고, 스트레스받는 환경으로 밀어 넣으면 생존하려고 발버둥 치게 되지만, 매너리즘은 느끼지 않게 되는 것 같다. 하는 일에 능숙해지고 익숙해졌다면, 팀을 바꾸거나 이직을 통해 자신을 좀 더 도전적인 환경으로 밀어 넣어 보는 거다. 물론 단순히 새로운 환경인 것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이직해도 결국 회사는 회사일 테니까. 새로운 환경뿐만 아니라, 담당하는 직무도 조금 바꿔보면 좋은 것 같다. DevOps를 쭉 해왔다면 MLOps로 방향을 틀어보는 식으로 말이다.
개발노잼시기를 극복하는 데 개발 말고 다른 일에 진심으로 몰입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지난 2년간 바이올린을 심취해 배우고 연습했는데, 그 마음가짐으로 개발도 공부하니 어느새 개발노잼시기의 터널을 지나 개발유잼시기로 넘어와 있었다.
한 가지 일에 깊이 몰입해 본 경험은 다른 일에서도 통용되는 것 같다. 쏟아부었던 에너지와 열정의 밀도를 본인이 기억하고 있고, 최고가 되기 위해 매일 꾸준히 노력하던 습관은 몸에 배어 있다. 나 역시 바이올린과 개발이 연결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바이올린을 하던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개발을 대해봤는데, 개발이 재밌어졌고, 호기심과 욕심도 뿜뿜했다. 나는 요즘 회사에서 일할 때도, 퇴근하고 개인 공부를 할 때도 바이올린을 하던 열정과 마음가짐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때 배웠던 깨달음들을 적용해 좀 더 똘똘하게 현명하게 개발 공부를 하고 있다.
다만, 다른 취미를 몰입하는 게 일반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내 주변에 테니스나 클라이밍을 깊이 몰입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는데, 그분들이 그 몰입하는 경험 덕분에 개발을 다시 재밌게 느끼고 있는지는 잘은 모르겠다. 오히려 테니스를 취미로 시작했다가, 영영 개발유잼시기로 돌아오지 못한 채 직장인으로 살며 테니스에 모든 열정을 붓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들 어떠하리. 결국 우리는 행복을 찾아 살아가는 것 아닌가. 인생을 통틀어 몰입하고 싶은 취미를 발견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