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리뷰
목요일, [단숨에 책 리뷰]
스물세 번째 책 :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지망(志望)’이라는 단어는 ‘뜻을 두고 바라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바라다’는 이루어지기를 ‘생각한다’는 뜻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지망이란 단어에서는 어떤 행동이나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는다. ‘돈을 바라고 너를 도운 게 아니다’라는 예문처럼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돕다’ 같은 행동이 이어져야 한다.
영화 감독 지망생. 우리는 박찬욱 감독과 봉준호 감독은 잘 알지만, 지망생은 잘 모른다. 제2, 제3의 박찬욱과 봉준호를 꿈꾸는 지망생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지망'이라는 단어 자체에 노력 이라는 맥락이 없다보니 지망하는 사람이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어가는지 살펴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예술적 영감은 어느날 갑자기 뿅 나타날 것 같다는 그런 영화 같은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지망과 달리 ‘준비(準備)’라는 말은 ‘미리 마련하여 갖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준비라는 말은 역동적이다. 무언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망생이 아닌 준비생일 때 그들이 하고 있는 무언가를 좀 더 들여다볼 동기가 생긴다.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이라는 준비생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실제 어떤 방식으로 준비를 하는지 생활을 들여다봤다. 또한 그들이 어떻게 멘탈 관리를 하고 있는지 심리를 들여다봤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살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회적 일기장 같은 책이다. 그 속에서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그들이 놓인 환경의 취약성도 드러난다.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15명의 영화감독 준비생을 만났다. 그들은 각자 다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 연출부로 일하는 사람도, 혼자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과를 졸업한 사람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사정은 다르지만 특징적인 부분도 있었다. 바로 다음의 세 가지다.
책의 저자는 영화감독 준비생들이 '막연한 미래로 인해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가정했다. 하지만 실제 15명의 준비생들은 대부분 ‘불안하진 않다’고 대답했다. 저자는 이들이 불안함을 디폴트 값으로 가지고 있다고 표현했다.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한 후에 내린 결정이었고, 이제는 그들의 생활이 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왜 이 사람들은 불안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판에 뛰어들었을까? 영화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이고, 내 개성을 찾는 곳이었다. 안정감만을 위해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만큼 불안한 게 있을까 라는 말에서 개성 표출에 대한 욕구가 드러난다.
아마 진짜 괴로운 건 ‘내가 평범할지도 모른다는 것’ 아닐까? 책 내용 중에 있는 단편영화제 심사평이 인상 깊었다. 그들의 작품들을 모아놓고 봤을 때 ‘거의 언제나’ ‘독창적인 영화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며 대부분 영화의 소재와 결론이 유사했고, 이는 ‘유독 ---가 많았다’는 심사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창의 노동을 하는 준비생들이 비슷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뜻이 아닐까 짐작해봤다.
준비생들은 책을 보고, 체험을 하고, 멍하게 있는 시간(실제로 뇌는 그 사이에 정보들을 연결 짓는다)을 보내고, 또 다시 쓰고 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매일 걷는 걸음걸음은 같은 소재를 다루더라도 나만의 시각을 어떻게 담아내느냐는 분투의 과정 일 테다.
그들은 의지를 가지고 매일매일을 꾸준히 살고자 한다. 열정 페이의 열정이 아니라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 번에 확 풀어놓지는 않는다. 탄수화물을 지방으로 비축하는 것처럼, 장기적인 에너지가 필요한 상황에서 그들은 열정을 의지로 변환시켜 저장해놓고, 매일매일 꾸준히 움직이려고 한다.
따로 또 같이는 그들이 생활하는 방식이다. 사비를 들여 영화를 찍어야 하고, 업무 공간이 필요한 그들은 서로 힘을 합쳐 해결하기도 한다. 돈을 모아 업무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들으며 서로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끈끈한 연대라고 하기는 그렇고 각자의 생활을 살아가는 그 모임은 일반 취업준비생들도 많이 하는 ‘스터디’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이 책도 영화 감독 준비생들처럼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감독 준비생들이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 것 까지가 이 책의 내용이다. 저자가 책과 논문에서 밝혔듯, 이들은 불안감이 디폴트 값이 되어 불안하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이와는 별개로 고난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사회구조적 취약함에 놓여있다.
저자는 곧 이 내용을 좀 더 확장시키지 않을까. 장강명 씨가 쓴 <당선, 합격, 계급>처럼 이를 공채 시스템의 문제로 연결 지을 수도, 혹은 영화 산업 자체의 취약성으로 연결 지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찌됐든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보여줄 수 있는 깊이감이 추후에 더 보완될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디지털 콘텐츠로 읽었다. 북저널리즘에서 프로모션 코드를 지급해서 읽어봤다. 다른 이북리더기보다 확실히 편리했던 것은 사실이다. 잡다한 프로그램을 설치할 필요 없이 한 페이지 안에서 모두 이루어졌다. 글이 술술 읽힌다는 장점이 있었다.
웹에서 바로 읽을 수 있는 콘텐츠의 장점은 LINER라는 어플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물론 별개의 어플이므로 요건 새로 설치해야 한다). LINER는 정말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애플리케이션인데 온라인과 모바일에서 ‘드래그를 통해 밑줄을 친다거나’ ‘밑줄 밑에 코멘트를 써놓을 수 있다거나’ 하는 기능이 있다. ‘밑줄 친 내용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페이지’도 있어 스크랩하기에 좋다.
그래도 디지털 네이티브가 아닌 나는... 여전히 종이책이 더 좋다. 책으로 읽을 때 콘텐츠를 더 진지하게 대하고 집중력 있게 읽게 된달까.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해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인 것 같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간을 들이고 집중력을 잃지 않는 것이다. 결과가 바로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노력을 멈춘다면 그들이 느끼는 불안함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인지 지망생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불안함의 큰 축은 나태한 자신이었다.
그들에게는 이미 불안이 '디폴트(default) 값'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망생들은 오랜 기간 불안에 파도를 타듯 대응하며 익숙함을 넘어선 일종의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배에 오르기 전 육지에서 배가 풍랑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불안해지고 겁을 먹게 된다. 하지만 실제 배에 오르면 흔들리는 상태가 기본 값이다. 항상 흔들리고 있기에 그 흔들림에 둔감해진다. 이들에게 이제 흔들리지 않는 상황은 포기한 옵션이다.
너는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 걱정되는 것은 너무 빨리 날려고 하다가 떨어지면 다시는 못 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자기는 멀리멀리, 오래오래 나는 새가 되고 싶다고. 처음에는 되게 날개도 예쁘고 멋지게 날아갈 수도 있지만 바로 추락해 버리면 그 이후에 너무 힘든 삶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너만의 사상, 너의 중심, 이런 것들을 가지고 조급하지 않게 출발했으면 좋겠다.
그들이 불안 혹은 소외를 겪고 있다면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프레카리아트라서가 아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지 않는 사회의 시선이 그들을 더욱 외롭게 하고, 믿고 있는 가치마저 의심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