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될 때> 리뷰
할머니께서 편찮으셔서 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주변엔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많이 계셨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곁에 있던 다른 할머니께서 갑자기 혼잣말을 시작하셨다.
“얼마 전에 자는데 누가 자꾸 날 보고 어딜 가자고 붙잡드라고. 내가 안 간다고 안 간다고 캤지.”
큰 인기를 끌었던 <도깨비>라는 드라마가 생각났다. 귀신과 저승사자를 소재로 한 이 드라마에서 저승사자는 정해진 수명이 다한 사람을 찾아가 저승으로 데리고 갔다.
나에게 죽는다는 것은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그야말로 신비한 것이었다. 그 할머니께서는 우리 문화에서 숱하게 이야기하는 저승사자를 본 것일까? 그렇다면 할머니께서는 새로운 세상의 문턱 너머를 보고 오신 걸 이야기하셨던 걸까? 하여간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주는 이미지는 그런 것이었다.
미디어를 통해서도 죽음을 많이 접했다. 그곳에서 그려지는 죽음은 대부분 죽는 순간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다. 또한, 당사자의 감정보다는 곁에 있던 사람의 슬픔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내가 접한 죽음의 이미지가 이런 것이다 보니 죽음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평소에 하는 자잘한 고민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것이리라는 생각밖엔 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 언젠간 죽는다. 그런데도 죽음이란 건 사실 피부로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의사가 내 남은 수명을 선고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폴 칼라니티가 남긴 자기 고백은 우리에게 죽음이 어떻게 다가오는지 알려준다.
매미가 떠올랐다. 매미는 땅속에서 7년을 기다려 세상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 긴 시간을 기다렸던 만큼 바깥에서의 시간을 간절하게 바랐을 것이다. 바깥으로 나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물을 남겨놓고 매미는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곧 땅위로 올라갈 수 있을 텐데, 인간이 땅을 헤집어 애벌레가 죽게 된다면 그 애벌레는 기다린 시간이 얼마나 억울할까.
젊은 레지던트 의사 폴 칼라니티는 긴 레지던트 기간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무한한 꿈을 펼치고자 했다. 그는 뇌 신경이라는 너른 바다를 이해하고 싶어 했다. 뇌 신경의 세계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다. 인간의 인식수준은 아직 넓은 캔버스에 점을 하나 찍은 수준일 뿐이다. 그는 앞으로 연구를 계속해 인류가 이 분야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길 원했다.
극적인 순간에 신은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 그는 폐암이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었다는 선고를 받았다. 푸른 하늘에 산뜻한 바람이 불 것만 같던 그의 앞날은 금세 먹구름과 거친 비바람으로 가득 찼다.
사실 나라면 그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억울해 미쳐버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공들여 높게 쌓아 올린 돌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끝없는 허무 속으로 나 자신을 내려보내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폴은 금방 냉정함을 되찾았다. 어제와는 다른 삶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 내장된 알고리즘이 재빠르게 진행됐다. 문제 상황을 파악하고 해결해야 할 것들을 착착 해나갔다.
나는 그 모습이 놀라웠다. 처음엔 그가 마치 기계처럼 사고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반 시민보다는 병을 더 잘 알아서 그랬을 수도, 그동안 많은 환자를 봐와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동안 다양한 책을 읽고 인간이 겪는 삶과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것도 이런 태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그는 그 많은 경험 자료들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의도했든 안 했든 그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사례들을 비교하고 분석하고 분류하는 연습을 계속했다. 그가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데는 어릴 때부터 이런 습관을 들여온 영향이 제일 크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미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오래전부터 폴은 환자를 대할 때 환자가 어떤 삶을 중시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환자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고 했다. 의사는 환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함께 찾고 남은 시간 동안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안 이후 그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를 찾았다. 의사가 되는 것과 작가가 되는 것 두 길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죽음이 다가왔을 때 삶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역설적인 상황이었다.
전에 <뚜르 : 내 생에 최고의 49일>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주인공은 26살에 나이에 자신이 희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다. 그도 그 순간 자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선명하게 한다. 그는 극한의 사이클 코스로 알려진 ‘뚜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 코스에 도전한다. 폴의 고백을 함께 읽고 나니 극한의 코스를 달리고 싶어 했던 그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 그가 원하는 것을, 생(生)을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작가가 되고 싶다는 폴의 개인적인 도전은 독자들이 죽음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줬다. 그가 담담하게 써 내려간 투병기록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신비스러움이 어느 정도 걷혔다. 오히려‘삶’ 자체를 더 강하게 느꼈다. 이 소설에서 죽음은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신비한 것이 아니었다. 죽음은 그의 삶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줬다. 그가 나아갈 방향은 더 명확해졌고, 그의 펜 끝은 더 뾰족해졌다. 곁에서 그가 죽음을 피하지 않고 더 이해하려고 해내는 작업을 보면 볼수록 그가 살아있다는 점을 강하게 느꼈다.
다시 생각해봤다. 내가 곧 죽는다는 선고를 받는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말이다. 평소에 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서로 더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대 이래로 물리적인 세계가 좁아졌다고는 하는데 기술 진보가 사람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를 가깝게 하지는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약 사람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면 이 땅 위에 많은 청년이 외롭게 ‘혼밥’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더 나아가 누군가의 혐오표현 때문에 자신을 숨겨야 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이 가진 공감 능력을 믿는다. 많은 독자가 폴과 완전히 같은 상황에 있진 않지만, 그가 쓴 투병일기를 읽고 그가 느꼈던 감정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겐 서로 더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는 그중에서도 힘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전하고 싶다. 숭고했던 그의 작업을 돌아보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그 덕분에 내 앞에 놓인 길이 더 조금 더 선명해지는 느낌이 든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는 경구(警句)가 처음으로 마음에 와닿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