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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로코 Barroco Feb 25. 2021

열 가지로 알아보는 비발디에 대한 에피소드

많은 분들의 관심과 성원에 보답드리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작곡가 이야기 시리즈.

last name의 알파벳 순서대로 진행을 해오던 건데 잠시 그 패턴을 깨버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덕질 중인 비발디에 관한 썰들을 풀어볼까 한다. 


1. 1678년 3월 4일 미숙아로 출생함

비발디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이날 점심 무렵 베네치아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벽에 임신한 배를 크게 부딪혔다고 한다. 그 바람에 뱃속에 있던 아기가 여덟 달 만에 나왔는데 그가 바로 안토니오 비발디이다. 허약한 체질을 가진 채 그럭저럭 성장해나가는 것을 보고 두 달 뒤가 돼서야 안심하여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2. 사제의 길을 걷다

사실 비발디 말고도 사제 겸 음악가인 사람들은 더 있었으나 비발디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경향이 있다. 아무튼 그 당시 가톨릭 성직자들은 앞길이 보장되고 또 사회에서 인정받기 때문에 물론 본인의 의지도 있었겠지만 아버지 지오반니가 적극 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사제 서품을 받기 전 수도원에서의 수행은 면제되고 대신 오늘날 식으로 쉽게 말하자면 수도원과 집을 통학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음악 공부에 더욱더 집중하고 매진할 수 있었다. 


3. 피에타 양육원

이 곳은 원래 환자나 여자 고아들을 수용하는 일종의 양호시설이었지만 점차 그 용도를 늘려 음악을 비롯한 여러 가지 교육도 겸하곤 하였는데 베네치아에는 이러한 시설들이 네 개나 있었다고 한다. 비발디는 바이올린 교사로 부임하여 합주장이 사망하자 그의 자리를 이어받아 베네치아를 말년에 떠나기 전까지 이 자리를 지켰다. 그의 대부분의 기악 작품들은 이 소녀들을 위하여 쓰였다고 보면 되는데 일각에선 그의 음악이 다소 유약한 게 소녀들을 위하여 썼기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필자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곡의 스타일은 물론 환경도 어느 정도 작용하겠지만 첫째로 작곡가의 마음이나 정신세계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4. 바이올린 연주의 대가

이에 대한 기록적 증거는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비발디의 바이올린 실력은 어느 누구에게나 칭찬과 선망의 대상이었음은 분명한 거 같다. 어쩌면 몇 세기 후에 인기를 누렸던 파가니니의 계보를 올라가다 보면 같은 이탈리아이니까 비발디가 아마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우리들에게는 사실 먼 옛날이야기인지라 어느 쪽이 더 우세하다 기교가 화려하다 등은 평가할 수 없기 마련이다. 어찌 되었든 남아 있는 작품들을 보면 대강 짐작할 수 있는데 개인적인 결론을 내려보자면 비발디가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무한한 가능성의 터를 잘 닦아놓은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5. 피젠델과의 인연

비발디의 작품들을 보다 보면 '피젠델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것들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이 피젠델이라는 사람은 독일 드레스덴 궁에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와 몇 년 동안 비발디를 사사하였다. 앞서 언급한 피에타 양육원의 원생들은 죄다 여성들이었던지라 유일한(?) 남자 제자로서 비발디가 아마도 특별히 아꼈을 법도 한데 피젠델 또한 자신의 작품들 대부분을 비발디에게 헌정하였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 드레스덴 궁정 오케스트라의 연주자에서 악장 자리에까지 승진하였는데 그의 작품들을 들어보면 독일 특유의 중후함보다는 비발디스러운 발랄함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6. 국제적인 작곡가로서의 명성

앞서 언급한 피젠델과의 인연이 있기 전부터 비발디와 드레스덴 궁 간의 교류는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을 거라 추정된다. 무엇보다도 비발디는 자국인 이탈리아의 인쇄 기술을 포기하고 암스테르담의 보다 선명하고 많은 양의 인쇄를 할 수 있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덕분에 J. S. 바흐가 비발디의 음악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결국에는 건반악기를 위한 편곡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7.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얼마 남아 있지는 않지만 비발디에 관한 일화들을 가만히 들어보면 그가 얼마나 밝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 자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듣는 음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결국에는 장수의 길까지 이끌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그는 63세에 사망했는데 허약한 체질의 옛날 사람치곤 오래 산 편이라고 할 수 있다. 


8. 각종 루머에 시달렸던 유명인

사실 미사 집전이나 안나 지로와 관계 등을 봐서라도 비발디 본인의 말 다르고 주변인들 말이 다른데 비발디가 워낙 유명하니까 그를 헐뜯고 무조건 까내리려는 사람들의 소행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안 하겠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가 끝내 파문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귀족이나 왕들을 중심으로 한 든든한 후원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9. 그의 사후 1

화려했던 지난 과거와는 달리 비발디는 결국 오스트리아 빈에서 쓸쓸한 생을 마감하는데 어째서인지 그의 무덤이 며칠 만에 헐려버려 다른 극빈자들의 유골과 뒤섞여버렸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그의 남아있는 유해를 찾는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이걸 왜 이야기하냐면 그의 키가 몇이었는지 등등의 법의학적인 결론을 전혀 내릴 수 없다는 걸 강조하고 싶어서이다. 바흐만 하더라도 유골의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여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큰 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비발디는 살아생전 어떠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다.


10. 그의 사후 2

사실 앞서 언급했던 트랜스크립션의 경우만 봐도 바흐가 아니었다면 비발디를 영영 몰랐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무지치를 필두로 오늘날의 여러 시대악기 연주단체에 이르기까지 비발디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연주하는 단체와 성악가들이 속속 등장함으로써 비발디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갓튜브라는 말이 있듯이 요즘 웬만한 클래식 음악은 대부분 유튜브에 다 있으니 작품번호로만 검색해도(예: RV 105) 미쳐 발굴하지 못한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작품들은 들을 수 있으니 많은 애용 바란다. 참고로 RV는 리옴이라는 사람이 비발디의 작품을 분류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우리말로 소개할 때는 리옴 번호 105번 이러면 된다. 



※ 헤더 이미지를 잠시 설명하자면 비발디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집에 내걸렸던 현판(?)으로서 그가 언제 어디서 출생했고 이곳에서 언제 사망했는지 등을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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