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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킴 May 29. 2021

우리는 누구나 춤출 자격이 있다.

드라마 <나빌레라>의 심덕출 씨는 우리가 생각하는 발레리노의 모습과 거리가 있습니다. 두상이 작고 팔과 다리가 긴 송강은 실제 발레리노 같은 포스를 풍겨내지만, 박인환 씨에게선 평범한 70대의 모습이 보일 뿐이거든요. 사실 나이를 감안한다 해도, 그의 체형은 어려서부터 발레리노를 꿈꿔왔다는 고백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공연을 자주 보고 스크랩까지 하는 열혈 발레 팬인 그가 무용수의 체격 조건에 대해 모를 리 없는데 말이죠.



원작인 웹툰에서는 발레에 대한 무게감이 드라마처럼 크지 않습니다. 심덕출 씨는 어린 시절 우연히 보게 된 발레가 신기해 따라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기회를 얻지 못했고, 발레는 마음 한구석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추억이 돼버린 거죠. 이 추억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아쉬움으로 자리하게 되고, 결국 버킷리스트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이것을 일생일대의 꿈으로 격상시켜버리니, 주인공의 외모가 자꾸 눈에 걸리더군요. 그래서 각본과 캐스팅에 의문 부호를 찍어 봅니다. 굳이 원작과 다른 설정을 고집하고 싶었다면, 한진희 씨 정도는 출연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발레는 신체 조건이 매우 까다로운 분야입니다. 선을 강조하는 예술이다 보니 큰 키에 작은 두상과 긴 목, 그리고 팔과 다리가 잘 빠진 무용수들을 선호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네임 밸류가 높은 발레단일수록 실력과 더불어 몸도 아름다운 무용수들이 많습니다. 이에 앞서 작품과 음악에 대한 이해, 그리고 발레 테크닉을 수행해낼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어쨌든 발레 보디(Ballet body)가 필수 요건임은 틀림없습니다.


젊은 시절의 웨인 슬립(Wayne Sleep)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 웨인 슬립(Wayne Sleep)의 경우, 외모를 빡쎄게 보는 영국 로열발레단에 겨우 157센티의 키로 입단했습니다. 그리고 은퇴 후, 영국의 티브이 쇼인, <Big Ballet>에서 거구의 무용수들을 훈련해 <백조의 호수>를 완성했습니다. 토슈즈가 몸무게를 이겨내질 못하고, 세 명의 남자가 들어 올려야 할 정도로 뚱뚱한 발레리나로만 오디션을 통해 뽑은 겁니다. 이렇게 발레에 적합하지 않은 무용수만 고른 이유는, 쇼의 취지가 ‘누구든 춤출 기회를 가질 자격이 있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발레를 해왔지만, 몸매로 인해 전혀 춤출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에게 체계적인 교육과 무대에 설 기회를 주려 했던 거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오디션의 기능을 역으로 이용했다고나 할까요.


빅 발레(Big ballet)의 <백조의 호수>


웨인 슬립이 키워낸 발레리나들의 영향인진 몰라도, 요즘은 플러스 사이즈의 무용수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모습을 SNS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연함과 단단한 코어를 기본으로 미친 점프력을 보여주거나, 심지어는 36회전을 성공시키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 발레단에서 그들에게 기회를 열어주진 않지만, 작은 무대에 서거나 온라인에 자신들의 춤을 공개합니다. 퍼포먼스에는 어떤 형태로든 관객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들 중 꽤 인지도가 있는 무용수가 있습니다. 에릭 캐버너(Erik Cavanaugh)는 “어떤 사이즈의 사람이든 무용수가 될 수 있다”, “춤을 출 수 있고, 몸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무용수의 몸이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는 워낙 체구가 크고 뚱뚱해서, 섬세한 동작이 잘 나타나질 않고, 점프도 둔해 보이긴 하지만, 유연성이 좋고 코어 또한 튼실합니다. 하이힐을 즐겨 신는 그는, 높은 신발에 거구의 몸을 올리고도 흐트러짐 없이 뛰고, 돌고, 가끔은 살포시(?) 날아오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춤에 대한 열정이 남달라 자신의 춤을 담은 게시물을 꾸준히 공개합니다.


에릭 캐버너(Erik Cavanaugh)


다시 드라마 속 심덕출 씨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그도 웨인 슬립처럼 발레 드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꿈을 이뤄낸 웨인 슬립과 달리, 심장 한구석에 열정을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다면, 만약 환경이 허락됐다면, 심덕출 씨도 발레리노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었겠죠. 그렇지만 분명 유리 천정에 부딪혔을 겁니다. 일단 왕자님 역은 맡지 못했을 것이고요, 키와 체격을 비슷하게 맞춰야 하는 군무도 힘들었을 것 같네요. 이런 이유로 웨인 슬립도 제한된 배역만 받았고, 뮤지컬과 안무, 방송 등으로 영역을 넓혀 활동했거든요. 짐작컨대, 아마 심덕출 씨의 인생도 그렇게 풀려가지 않았을까요?


 

마린스키 발레의 김기민


이런 상상을 하니 드라마의 서사에 설득이 됩니다. 심덕출 씨는 어떤 형태로든 무용수의 삶을   있었을 것이고, 원하는 삶을 살기에 행복했을  같습니다. 그래서 변방의 무용수들에게 응원을 보내봅니다. 발레는 아름다운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것이 일반적 생각이겠지만, 절실히 원해 춤추는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관객들 또한 분명 존재하고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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