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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물작가 윤 May 02. 2021

5월, 눈이 내린다.

겨울이 들러 간 봄날 밤

22년 만에 강원도 대설주의보라고 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 울린 안전 안내 문자가 초대장 인양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겨울 옷은 모두 드라이하거나 빨아서 넣어두었다.

반팔 티셔츠에 긴팔 셔츠를 입고 회색 긴 조끼를 덧입었다. 검은색 봄 재킷을 걸친 후 여름용 큰 스카프를 둘렀다. 집에서 편히 입는 인견 바지 위에 카키색 봄치마를 입고 양말을 신으니 맨다리에 찬 바람이 닿았다.

차에 타자마자 시트를 따뜻하게 데우고 목적지를 설정했다.


정선아라리촌, 51km, 50분.


영월은 비가 내렸다. 정선쯤 가면 눈을 볼 수 있을까 싶었다.

5월에 눈을 볼 수 있는 건 강원도민만의 즐거움이 아니겠냐며, 음악을 들으며 빈 도로를 달렸다.


지난달 중순에 영월로 이사 오면서, 가장 고민했던 게 차였다.

강원도는 차 없이 어딜 다니는 게 어렵다. 강원도 고성군민으로 지냈던 2018~2019년에 차가 있었더라면, 훨씬 더 많이 고성을 즐겼을 거라 아쉬웠었다. 큰 결심하고 캐피탈 도움으로 내 차를 굴리게 됐다. 무슨 차냐가 아니라 차가 있다는 자체로 즐거웠다.

평생 5월의 눈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나는 소녀처럼 달뜬 마음으로 밤길을 달렸다. 서울이라면 자정 넘은 빗길에 무슨 차가 이리 많냐고 했을 텐데, 가로등과 다른 차들 없이 내 차의 헤드라이트가 도로에 비치는 유일한 빛인 길도 꽤 길었다.


정선으로 들어간 지 한참인데 계속 비가 내렸다. 

차를 세우고 찾아보니 정선 기온은 섭씨 2도였다. 엉덩이는 따뜻하고, 봄비도 따뜻했다. 대설주의보를 자세히 보니 대관령이나 한계령은 가야 눈을 볼 수 있는 거였다. 초대장을 자세히 읽지 않은 내 탓이다. 안전하게 집에 있으란 안내에 차를 끌고 나온 내 선택이 잘못이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차를 돌릴까? 대관령을 갈까?

이번엔 잘 선택하고 싶었다.


새벽 1시 넘어 다시 영월로 돌아가도 비 오는 날 분위기 있는 드라이브였으니까 괜찮아.

하지만 5월에 내리는 눈을 보고 싶던 거 아냐?


여기서 대관령을 가면 1시간쯤 걸리니 영월에 돌아가면 5시가 되겠지만, 눈을 보는 거잖아.

하지만 6개월만 있으면 눈을 언제든 볼 수 있는데 5월의 눈이 무슨 큰 의미라고 지금 컨디션에 대관령까지 다녀와야겠어?


둘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게 더 나은지, 어떤 게 덜 나쁜지 재다가 창문을 열었다. 바람과 함께 비가 차 안으로 내렸다.

정선 끝쪽 정암사는 찬바람만 불었는데, 함백산 쪽으로 올라갔다가 서리가 가득했던 게 떠올랐다.


함백산. 38km. 35분.


둘 중 선택하지 않고 새로운 선택을 했다. 

생각해보면

그간 둘 중 하날 선택하려던 것은 

선택지를 줄여 쉽게 결정하려던 '나의 선택'이었지, 

누구도 내게 둘 중에 하나만 택하라고 한 적이 없었다.


강원랜드 근처의 밝은 불빛을 지나 다시 어두운 길을 지나자 부처님 오신 날이 머지않아 등불 켠 정암사가 보였다. 비 내리는 한밤중의 정암사는 더 운치 있었다. 불안과 기대가 뒤섞였다. 5km만 더 가면 만항재 쉼터인데, 아직 비가 눈으로 변하지 않았다.


정암사 주차장에서 차를 돌릴까? 조금만 더 올라가 볼까?

10분이면 확인할 수 있는데, 저 멀리 밝게 보이는 정암사 수마노탑을 보면서 불안이 더 커졌다. 뭐하러 이 새벽에 차를 끌고 정선 끝까지 왔을까? 안전 안내 문자가 무슨 초대장이라고 낭만에 들떠 움직였을까? 몸이 으슬으슬했다. 5월에 눈이 오면 지구나 걱정할 것이지, 차를 끌고 나와 환경오염에 일조하다니. 오만 생각이 들었다.

이왕 왔으니, 가자!


생각하고 얼마 올라가지 않아 눈이 내렸다. 비가 눈으로 변한 경계는 아주 미묘해서 어, 하는 사이였다.

복잡한 생각으로 고민하던 정암사 주차장에서 보낸 시간에 비해 찰나였다.


고민하는 시간에 선택해서 행동하면 불안할 필요 없이 결과를 알 수 있는데, 

선택을 미루고 불편한 마음으로 지낸 날들이 얼마나 되던가. 

셀 수 없었다.


만항재 쉼터에 차를 세웠다. 5월의 따뜻한 눈길을 걸었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을 걸었다. 아무도 보지 않은 나무에 쌓인 눈을 보았다. 눈의 궤적을 눈과 카메라에 담고, 쑥 자라 버린 초록색 잎 위에 쌓인 눈과 얘기하고, 눈길 위에 선 내 그림자에 놀랐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내 그림자는 두 개였다. 두 그림자 중에 어떤 게 진짜 나일까?

이건 선택할 필요가 없다. 모두 나다.


쉽게 선택하려고 선택지를 두 개로 줄이는 것도 나고,

선택했다가 결과가 나쁠까 봐 고민을 길게 하는 것도 나고,

아무 선택하지 않아도 되고, 뭐든 선택해도 되는 것도 나였다.



눈이 펄펄 내리는 함백산은 따뜻했다.

이젠 5월이 되면, 만항재에서 맞은 눈이 떠오르겠지. 

그런 기억을 만들기로 선택하길 잘했다.

내 머리를 쓰담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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