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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빈 Aug 31. 2022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

  -삶의 고통과 치유의 예술     

                                              

                                         시인 ‧ 문학평론가 김한빈     


          

1. 머리말     


 문학은 자연과 인생을 다루는 예술의 한 영역이다. 따라서 문학 작품에 자연과 인생을 바라보는 창작자의 세계관이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옳은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세계를 맹목적인 의지가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 독특한 철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쇼펜하우어이다. 그리고 그는 삶의 고통에 주목한 용기 있는 철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 글은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년~1860년)의 예술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권기철 옮김, 2008』과 여러 학자의 논문 등을 정리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쇼펜하우어의 예술개념에 대한 고찰, 이서규, 2009」「인간의 고통과 예술의 역할, 공병혜, 2015」,「고통과 예술, 정낙림, 2016」,「철학에서 무관심성, 김동욱, 2018」, 「니체의 실존적 비극과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과의 관계, 양해림, 2016」등이다.



2.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 주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인간 삶의 본질인 ‘고통’의 근원에 대한 탐구이다. 이러한 탐구는 인간 삶의 존재론적 고통의 근원이면서,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맹목적인 충동’인 ‘의지’에 대한 통찰을 하고자 하는 데에 있다. 그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과제를 예술에 부과한다. 이때 형이상학(形而上學)은 존재의 근본, 세계의 궁극적 근거를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예술이 지니는 형이상학적 세계인식과 이것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자기 집착에 의한 고통에서 벗어나 윤리적으로 변화하는 치유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술은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육체를 매개로 하여 껍데기에 불과한 ‘표상’의 세계에 얽매인 이기적인 성향에서 벗어나, 동정심을 품고 세계와 타자와의 연대적 감정을 통해 도덕적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영향력을 지닌다.


 쇼펜하우어는 고대 그리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근대 철학자 칸트의 물자체, 고대 인도 우파니샤드의 브라만 사상 등에 기반하여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에서 맹목적 삶의 충동인 근원적 ‘의지’가 어떻게 이 세계에 현상되는지에 대한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해 고찰하고 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의 첫 문장이다. 쇼펜하우어에서 ‘표상’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즉 개체화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현상 세계가 우리에게 드러나는 방식이다. 이에 반해 ‘의지’는 개체화의 원리의 지배를 받지 않는 현상계 너머에 있지만, 현상계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세계의 본질이다. 칸트식으로 보면 표상(Vorstellung)은 ‘현상’에, 의지(Wille)는 ‘물자체’(Ding an sich)에 비교될 수 있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그의 학위 논문『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대하여』(Ueber die vierfachen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에서 이미 기본적 틀을 보여준다. 충족이유율이란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존재하기 위해 필연적 이유와 근거를 가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는 세계에 대한 주체의 ‘표상’이다. 즉 객체라고 일컫는 일체의 것이 ‘표상’이라는 의미이다. 쇼펜하우어는 ‘표상’을 크게 직관적 표상과 추상적 표상으로 구분한다. 직관적 표상은 주체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마주하는 직접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추상적 표상은 경험의 추상물인 개념과 관계하는 것으로 이성 활동의 산물이다. ‘표상으로서 세계’, 즉 객체는 주체의 선험적 인식조건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성의 법칙에 의존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 따라서 표상으로서 우리에게 알려지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현상계, 즉 가변적인 세계를 의미한다.(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는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가진 가변성을 자주 꿈에 비유한다. ‘표상으로서의 세계’인 현실은 밤에 꾸는 짧은 꿈에 비해 단지 긴 꿈일 뿐이다. 또 ‘표상의 세계’를 존재의 진리를 숨기고 있는 ‘마야(환영, 허위)의 베일’(das Gewebe der Maja)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마야의 베일 뒤에 숨은 진정한 세계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세계는 표상이면서 동시에 “세계는 나의 의지이다”라는 말로 답한다. “객관적인 세계, 즉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세계의 유일한 면이 아니라 단지 한 면, 말하자면 세계의 외적인 면일 뿐이며, 세계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면이 있는데 그것이 세계의 가장 내적인 본질이자 핵심인 물자체이다.”


 표상의 너머, 마야의 베일 너머에 있는 것, 물자체와 같은 것이 바로 ‘의지’이다. 칸트에서 물자체는 지각할 수 없고, 더욱이 현상 세계에 소극적 역할만 할 뿐이지만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엄밀히 말해 모든 ‘표상’은 ‘의지’의 지배를 받으며, ‘의지’가 현상 세계에 드러난 방식이 ‘표상’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표상의 세계’를 구체화한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에서 ‘의지’는 오직 하나이다. “의지는 개체화의 원리인 시간과 공간 밖에, 즉 다원성의 가능성 바깥에 존재하는 것으로의 하나이다.” 그런데 ‘의지’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하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계획된 행위를 유발하는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맹목적인 충동 혹은 힘의 형태로 드러난다.


 하나의 절대적이고 알 수 없는 ‘의지’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성의 법칙, 즉 개체화의 원리에 따라 현상계에 객관적 형태로 드러난 것이 개별자들이다. “모든 표상, 모든 객관은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난 것, 가시적으로 된 것, 객관화한 것이다. 의지는 모든 개체와 아울러 전체의 가장 심오한 부분이자 핵심이다. 의지는 맹목적으로 작용하는 모든 자연력 속에 나타나고, 인간의 숙고한 행동에서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 둘의 커다란 차이는 나타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나타나는 것의 본질의 차이는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개체화의 원리’ 또는 ‘개체의 존재 근거’이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개체는 ‘의지’가 객관화된 산물이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없고 세계도 없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자연의 중력과 인력도 ‘의지’의 산물이며, 식물의 광합성 작용과 동물의 본능 그리고 인간의 욕망도 모두 ‘의지’의 객관화이다. 더 나아가 신체의 부분들에도 ‘의지’가 객관화된다. “치아, 목구멍, 장기는 객관화된 배고픔이고, 생식기는 성욕의 객관화이며, 물건을 잡는 손이나 재빠른 발은 그것들이 표현하는 보다 간접적으로 된 ‘의지’의 노력과 상응한다.”


 인간의 사유, 동물의 본능, 식물의 생장 뒤에는 ‘의지’가 있다. 인간에게 ‘의지’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맹목적 태도로 드러난다. “오직 이 의지만이 (...) 현상을 푸는 열쇠를 주고, 의미를 밝혀주고, 그의 존재, 행위 및 운동의 내적 충동을 보여준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신체의 행위는 객관화된, 다시 말해 직관으로 드러난 ‘의지’의 행위이다.”라고 말한다. 식욕, 배설욕, 성욕 그리고 우리의 신체와 관련된 욕망에서 우리는 ‘의지’의 가장 직접적인 발현을 확인한다.(정낙림, 2016. 참조)     



3. 의지와 이념  

   

 쇼펜하우어는 하나의 통일적인 ‘의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적합하게 객관화되는 가시성(Sichtbarkeit)과 판명성(Deutlichkeit)의 정도에 따라서 다양한 ‘의지’의 객관화의 단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의지’가 객관화되는 단계는 낮은 단계의 돌이나 식물로부터 높은 단계의 동물이나 인간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등급을 지니며, 거기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별화의 원리와 인과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사물의 영원한 형식이 내재한다. 이것을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적인 의미에서의 ‘이념’들, 즉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의지’가 가장 순수하고 완전하게 직접적으로 객관화된 것이라고 칭한다. 이러한 근원적 ‘의지’가 가장 직접적으로 객관화된 각 단계마다 존재하는 ‘이념’들은 인식 주관의 의식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별화 원리(Das Prinzip der Individuation)를 통해 무수한 개별자 속에서 다양화되며, 그러한 개별자들은 생성과 변화에 대한 인과율에 따라 경험이 가능한 것이다. 즉 ‘의지’가 객관화된 단계의 ‘이념’이 개별적 대상을 통해 다양화되는 조건은 주관의 의식 속에서의 시간과 공간이며, 이러한 개별적 대상의 생성과 변화에 대한 인식과 경험은 오로지 주관의 인과 법칙하에서 가능한 것이다.(공병혜, 2015. 참조)


 쇼펜하우어는 ‘이념’이 모든 진정한 예술 작품의 참되고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념’은 ‘의지’에서 자유로워진 순수 인식 주관에 의해 직관 된다. 이러한 인식 주관은 대상을 이유율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포기하고, “그것의 힘찬 근원성 속에서 생명 그 자체와, 자연과 세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념’을 직관한다. 이러한 ‘이념’을 보존하고 재현하며, 전달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자가 천재이다. “이념은 직관적이고 늘 그러하므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 의도와 목표를 추상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며,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개념이 아닌 ‘이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해명할 수 없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한 감정에서, 무의식적으로, 그러니까 본능에 따라 작업한다.”


  쇼펜하우어에서 천재란 ‘의지’를 적극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예외적 힘을 가진 존재이다. 천재는 ‘의지’에 지배받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순수하게 인식하는 주관으로서 맑은 세계의 눈으로 남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천재를 “세계의 본질을 비추는 맑은 거울”에 비유한다. 그렇다면 천재의 어떤 예외적인 힘이 의욕 하는 주체를 순수한 인식 주관으로 고양할 수 있는가? 쇼펜하우어는 천재의 능력이 ‘환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환상(Phantasie)이 천재성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다. “환상이란 이념을 인식하기 위한 수단이며, 그 이념의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 예술 작품이다.” 환상은 충족이유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천재는 개별자의 인식이 아니라 이념을 직관할 수 있다. 그리고 천재는 ‘의지’에 봉사하는 자신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관심, 의욕, 목적을 추구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자기 보존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순수한 인식 주관이 될 수 있고 ‘이념’을 직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재에게 환상은 “세상을 환하게 만드는 태양”과 같은 것이고 천재의 환상에서 미적 직관이 가능하게 된다.(정낙림, 2016. 참조)  


   

4. 삶의 의지   

  

 맹목적인 삶의 충동으로서의 ‘의지’는 무기물에서 자연력의 긴장, 식물 세계에서는 자각과 반응의 생명력으로 드러나며, 특히 동물과 인간의 성욕을 통해서 표현되는 삶의 ‘의지’는 가장 적합하게 객관화되기 위한 종족 보존의 본능으로 이어진다. 즉 자연계에서 수없이 많은 종과 개별자들은 ‘의지’의 가장 적합한 객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종의 보존을 위해 동물들은 주저 없이 식물들을 자신의 식량으로 사용하고 인간 역시 서로를 탈취하는 자연의 충동 사슬에 결속되어” 생존 투쟁을 벌이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성욕이야말로 가장 강한 삶의 충동 표현이며, 동시에 개인의 욕망을 수단으로 한 종족 보존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모든 사랑의 열정은 개별화된 성 충동 때문에 발현되자마자 종적인 성 충동, 즉 다음 세대를 구성하는 삶의 ‘의지’로 이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성 충동에는 인간의 시간적인 유한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개체의 생산을 통해 존재를 영구화하려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음을 파악한다. 즉 인간의 성 충동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삶의 ‘의지’의 긍정적 표현으로서 종 안에서 보편성의 확보와 개체 생산을 통한 자아의 무한성의 확보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공병혜, 2015. 참조)     


 

5. 삶의 본질로서의 고통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에서 고통의 원인을 이러한 ‘의지’의 현상으로 ‘표상의 세계’ 속에 인간이 존재하는 사실과 ‘의지’에 대한 자기의식이 의욕으로 드러나는 개체성의 경험에서 찾는다. ‘의지’의 객관화된 현상으로서 인간의 자기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의욕’은 고도의 인식능력을 수단으로 하여 지속해서 자기 보존을 위한 행위의 동기로 작용하며 고통을 일으킨다. 그래서 인간의 자기 보존의 이기적인 집착에서 오는 존재론적 고통은 육체적 자아에서 드러나는 ‘표상의 세계’에서 발생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의 ‘의지’는 육체적 자아를 통해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에 의해 표상된 나의 의식 세계 속에 “자기 보존욕”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보존욕은 자기의식 속에 들어온 ‘표상’들을 자기를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의지’를 자신의 ‘의지’에 봉사하도록 강제하는 이기주의로 나아가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한한 세계에서 아주 보잘것없고 미미한 각각의 개별자는, 그러나 자신을 세계의 핵심으로 삼고, 모든 다른 것들보다도 자신이 고유한 실존과 행복을 고려하고, 자연스러운 자아의 출발점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한 제물로 삼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바닷속의 물방울인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오래 보존하기 위해, 마치 이 세계도 멸망시킬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기심은 ‘나’라는 주체의 자기 보존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나오며, 인간의 지성은 끊임없이 그 욕망을 부추기지만, 채워지지 않는 좌절로부터 고통은 지속된다. 쇼펜하우어의 존재론적 고통은 육체를 지닌 주체의 자기 보존의 욕망에서 나온 삶에 대한 집착에서 생겨나며, 자의식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자기의식에서 비롯되는 고도의 인식작용은 오히려 자기 보존 욕구를 부추기는 수단으로 작용하며, 충족될 수 없는 인식과 욕구는 끊임없이 불화와 투쟁을 지속시킨다. 그래서 ‘나’라는 주체에 의해 ‘표상된 세계’는 온갖 악과 이기주의, 시기와 허욕, 미움과 복수, 파괴 욕구와 잔인성, 고통과 부조리,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세계이다. 인간이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세계는 궁핍과 불안에서 야기되는 고통과 과잉에서 오는 권태, 이 양자 사이에서 약하게 혹은 강하게 진자운동을 하는 혹은 욕망이 흔들리는 투쟁 장소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이러한 자기 보존욕은 개별자의 육체의 죽음으로 사라지는 ‘표상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지만, 이 욕구는 존재론적 성 충동의 이기심을 발현시켜 삶의 고통과 고뇌가 새로운 개체로 지속하여 세대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육체를 지닌 존재의 사멸성에 대한 불안과 자기 보존 욕구라는 이기심 사이에서 인간의 성 충동은 자기 보존의 지속을 새로운 타자의 생식으로 인한 종의 지속으로 이어지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에로의 의지, 그것의 현상으로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개별자는 삶에의 의지에 대한 하나의 실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연은 한 개별자의 죽음으로는 병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에서 중요한 것은 종이기 때문이다.   

  

 인간 삶에의 ‘의지’는 인간 종의 지속이라는 ‘이념’ 속에서 실현되며 개별자는 성욕을 통해 인류의 보존에 이바지한다. 즉 개별자는 자신의 출생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체의 생식을 하고, 자기 죽음을 통해서 다른 생명체를 위해 공간을 제공하면서 인간 삶의 ‘의지’는 시간 속에서 지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성 충동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개별자의 사멸과 새롭게 태어나는 개별자 사이에서 지속하는 생존 투쟁의 고통을 인류라는 종의 본질로서 이어나가게 한다. 성 충동은 무한한 시간적 지평 위에서 세대를 이어가게 하는 삶의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에, 인류가 지속하는 한 자기 보존을 위한 그 고통은 지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개별자로서 이 세상에 실존한다는 것은 현존재에 대한 중단 없는 싸움과 고통이며, 이것은 성욕을 통한 새로운 생명체의 생식을 통해서 지속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육체를 지닌 인간이 개별자로서 자기의식을 지니고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인과 법칙에 따른 주관의 ‘표상의 세계’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개별자의 자기의식 속에 ‘의욕’이 존재하고, 인식이 지속적으로 ‘의지’의 수단이 되어 ‘의욕’이 일어나는 한, 고통은 벗어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다.(공병혜, 2013. 참조)


 다시 말하면, 문제는 인간이 ‘표상의 세계’가 맹목적인 ‘의지’가 드러난 가상의 세계임을 깨닫지 못하고, ‘의욕’하는 주체로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고뇌에 가득 찬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의욕’이 저지되는 것을 고통(Leiden)이라 부르고, 이와 반대로 ‘의욕’이 일시적이나마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충족(Befriedigung)이라 부른다. 맹목적인 ‘의지’의 본성에 따라 인간은 무엇인가를 지향하지만 그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고뇌에 빠진다. 그러나 어떤 목표가 간단히 이루어지면, 그의 존재 자체가 견딜 수 없는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인간은 공허(Leere)와 권태(Langeweile)를 느끼게 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고통과 권태가 인간 삶을 이루는 최종적 존립 요소라고 말한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쁨이라 여기는 ‘의욕’의 충족마저도 쇼펜하우어는 고통으로 간주하며, 이 모든 것을 부인한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최종적인 목적지인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단적으로 고통으로 간주한다.(김동욱, 2018. 참조)  


 그러나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 자기 존재의 근원을 인식하는 예외적 인식상태가 있다. 이 예외적 인식상태란 주체의 자기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자기 보존 욕구로부터 해방되어 전체로서의 ‘의지’ 그 자체가 객관화된 세계의 본질을 인식하는 상태이다, 즉, 이것은 ‘의지’의 “명석한 거울”(klarer Speigel)로서 “플라톤적인 이념”(die platonische Idee)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는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이념’이 예술의 대상(das Objekt der Kunst)이며, 이것은 미적 인식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관찰은 개별적인 사물을 인식하는 데 그칠 뿐이다. 하지만 미적 관조는 우리로 하여금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미적 관조가 가능한 조건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이성의 대상, 즉 개념이나 의식에 집착하게 되면 이러한 관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모두 충분 근거율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둘째, 의식이 인과 법칙을 쫓아가거나 관찰된 대상의 근원을 찾으려 하는 한 미적 관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찰 방식은 끊임없이 그 근거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셋째, 미적 관조는 의욕의 주체가 사라져 버릴 때 가능한 것이다. 넷째, 미적 관조는 관조하는 자와 관조하는 대상 사이의 구분이 행해지지 않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6. 의지의 진정제로서 예술    

 

 쇼펜하우어의 주장처럼, 인간이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면, 어떻게 욕망 추구와 충족·불충족의 무한한 연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처럼 근원적인 고통에 직면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 대해 그는 차선책을 제시한다. 자신의 신체를 없애는 극단적인 방법 대신에 ‘상상적’ 자살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개별자로서 인간이 가진 ‘이기심’을 버림으로써 ‘의지’가 개별화된 개인성이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개별화된 개인성을 초월하는 몇몇 경우 중 하나가 바로 천재의 삶이다. 이기적인 본성에 기인한 개별적 인간은 언제나 ‘의욕’에 지배를 받지만, 타고난 능력으로 ‘의욕’보다 인식이 뛰어난 천재는 개별적 인간이 지닌 사적 관심을 완전히 버린 채 관조할 수 있다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고 천재의 본질은 마찬가지로 압도적인 관조 능력에 있다. 왜냐하면 이제 이러한 관조는 고유한 개인과 개인의 관련을 완전히 잊어버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재성은 다시 말해 고유한 개인으로 즉, 의지로 가는 주관적인 향함에 대조적인 정신의 객관적인 향함인 가장 완전한 객관성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재성은 순수하게 직관적으로 태도를 취할 수 있고 직관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며, 본래 단지 의지에 봉사하기 위해 있는 인식을 이 봉사에서 빼앗을 수 있는 능력이다. 즉, 그의 관심, 원함, 목적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이며, 따라서 순수하게 인식하는 주관(rein erkennendes Subjekt)으로, 맑은 세계의 눈(Weltauge)으로 남기 위해서, 그의 개인성(Persönlichkeit)을 일시에 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     


 ‘표상의 세계’를 살아가는 대다수 인간은 인식보다 ‘의욕’이 우세하고, 인식작용은 언제나 ‘의욕’의 자극을 받아 활동하며 그래서 사적인 이익에 의한 행동을 할 뿐이다. 그러나 천재는 ‘의욕’보다 인식작용이 우월하며, 여기에서 순수한 인식작용은 곧 사적인 이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관심한 인식작용을 의미한다. 이렇듯 일반인과 달리 천재는 탁월한 인식능력 덕분에 의지에 얽매인 삶에서 벗어나서 관조적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리고 천재는 관조에서 파악한 ‘이념’을 예술의 형태로 재현한다.


 쇼펜하우어는 의욕에 지배되는 개인의 이기심에서 개인의 고통이 발생한다고 본다. 이기심으로 가득 찬 수많은 개인 사이에서 한 개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타인과 투쟁을 벌여야 하며, 모든 투쟁에서 승리할 수도 없다. 또한 몇몇 투쟁에서 승리를 거둔다고 할지라도, 타인과의 투쟁 과정에서 갈등과 번민 그리고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는 이러한 이기심의 원인을 인식이 개별화의 원리에 종속된 상태에서 찾는다. 개별화의 원리 아래에 놓여 있는 개인은 대상과 타인 그리고 세계를 오직 자신의 이익과 행복의 관점에서 고려할 뿐이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욕’이 지배하는 일상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사물 자체의 본질인 영원한 ‘이념’을 직관할 경우, 모든 ‘의욕’은 진정될 수 있다. 천재이자 예술가인 자의 활동이 바로 이와 같은 사물 자체의 본질인 ‘이념’을 직관하는 것이요, 이 ‘이념’을 다양한 예술의 형태로 재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천재와 예술적 활동에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실마리를 발견한다.(김동욱, 2018. 참조) 이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일상 삶에서 모든 의욕은 욕구와 결핍과 고뇌로부터 생긴다. 욕구의 충족은 일시적이고 극히 적어서 그 욕구는 지속하고, 갈망 또한 지속한다. 그러나 언젠가 내적인 기분이 우리를 갑자기 끝없는 의욕의 파도로부터 끄집어내고, 인식을 의지의 노예 상태에서 구해내고, 더 이상 의지의 동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사물을 의지의 관계로부터 해방해 파악한다면, 즉 이해 관계 없이, 주관의 개입이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으로 사물을 관조한다면, 그러면 의지의 모든 첫 번째 길에서 찾고자 했던 항상 달아나는 평온함이 갑자기 스스로 나타난다.     


 여기서 ‘의지’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사물에 대한 인식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물의 인과 법칙에서 벗어난 ‘이념’에 대한 인식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이념’이란 “플라톤적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사물의 본질의 세계이며, 근원적 ‘의지’가 가장 적합하게 객관화된 단계의 ‘이념’이며, ‘표상의 세계’에 속한 개별자들에 대한 일종의 보편적인 영원한 형상을 말한다. 이러한 플라톤적 ‘이념’에 대한 인식은 주체의 육체적 감응을 매개로 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근거율에 따른 개별적 경험이 아니다. 즉 “언제, 어디, 왜, 무엇을 위해서”라는 주관과 사물의 관계성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식이며, 또한 이성에 의해 학문적으로도 개념화될 수 없는 직관적 인식이다. 이러한 ‘이념’에 대한 인식은 미적 직관(ästhetische Anschauung)에 의해 가능하며, 공간, 시간, 인과성으로부터 해방된, 오로지 “대상에 대한 전체적인 의식이며, 명석한 거울(klarer Spiegel)”인 것이다. 이때 주관은 대상에 완전히 몰입되어 자기 스스로 잃어버리며 인식이 끊임없이 ‘의지’의 수단이 되는 ‘의욕’이 일어나지 않는 순수한 정관 상태에 이르게 된다.(공병혜, 2015, 참조)


 ‘의지’가 완전히 객관화된 ‘이념’을 인식하는 순간, 주관은 그 대상에서 자기와 같은 ‘의지’를 만나게 되어 하나가 될 때 그 대상에 몰입할 수 있다. 자연에서의 식물이나 동물을 관조할 때 주관은 더 이상 개별자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 주관은 마치 “하나의 풍경, 한 그루의 나무, 한 개의 암석이라 하더라도, 바로 현재하는 대상을 조용히 정관함으로써 그것이 의식 전체를 꽉 채우며, 대상 속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상태를 바이런의 시를 인용하여 “마치 산, 파도, 하늘은 나와 내 영혼의 일부분이 아닐까, 내가 그들의 일부분인 것처럼,”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주관이 자신의 순수한 의식 속에서 ‘의지’가 객관화된 대상과 합일을 이루는 신비로운 순간이 바로 ‘이념’에 대한 직관이 이루어지는 정관 상태이며, 이때의 인식은 익시온의 수레바퀴처럼 지속하는 ‘의지’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순수한 순간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념’에 대한 인식을 통해 이러한 미적 정관의 순간이 가능한 것인가?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것은 예술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술의 과제란 사물의 내적인 본질로 향한 인식의 순간을 보존하여 순간의 무상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모든 삶의 흐름에서 금방 사라지는 사사로운 개별적인 것은 예술을 통해 전체(보편적인 것)로 재현된다.” 그래서 예술은 ‘이념’에 대한 인식을 통해 현상의 세계에서 “왜, 무엇을, 어떤 목적”이라는 관계의 사슬로부터 발생하는, 고통이 존재하는 시간의 바퀴를 멈추게 한다.


 그러면 이러한 예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천재의 작품을 통해서 가능하다. 왜냐하면 천재에 의한 “예술만이 순수한 정관을 통하여 파악된 영원한 이념들, 본질적인 것 그리고 모든 세계의 현상들의 변하지 않는 것을 반복”하기 때문인 것이다. 예술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천재의 인식능력은 자신의 고유한 ‘의지’의 봉사로부터 자유로워져 삶 전체를 정관 상태에 머물게 한다. 천재성의 요소로서 판타지(환상)는 지성에 의해 다른 사물과의 관계나 목적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여 의지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모든 사물의 이념을 인식해서,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을 지닌다. 여기서 천재성은 바로 인간이란 종의 의지의 완전한 객관성이며, 고유한 개인을 향한 주관적 의지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세계와 하나가 되는 열망을 지닌다. 천재 활동의 궁극적 지점은 개인의 의지 작용에 대한 지양이며, 그 순간에 천재는 “의지의 강제 노동으로부터 안식”한다. 천재는 순수한 정관 상태에서 파악된 ‘이념’을 예술 작품에 보존하여 독자에게 다시 반복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은 바로 “자신을 잃어버려 순수한 정관 상태에 이르게 하는” ‘이념’에 대한 인식에 있는 것이다.


 천재는 자연을 관조하면서 사물의 우연적인 경험의 요소를 제거하고 자신이 파악한 각 사물의 ‘이념’을 수천 번의 시도와 실패를 거쳐 자신이 파악한 ‘이념’을 예술 작품 속에 재현한다. 그래서 천재의 작품은 다른 자연적 대상에서 더 훨씬 쉽게 ‘이념’을 전달하고 독자에게 파악하게 하여 순수한 정관과 고요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정신의 평온함이 깃든 네덜란드의 정물화들이나 풍경화들처럼 미적 관조를 일으키는 대상은 예술가의 정서 상태를 다시 불러일으키며, 객관적으로 사물을 직관하고 주의 깊게 바라보게 한다. 예술을 관조하는 정서는 그림에 대한 직관을 통하여 사물 속에 침잠해 들어가는 고요의 상태로 바뀌게 된다. 이것은 행복하거나 불행한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완전히 다른 사물과의 관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침잠과 만족의 상태는 개인이 시간과 공간과 인과율의 법칙에 지배를 받는 일상적인 삶 속으로 쉽게 사라질 수 있다. 왜냐하면 정관의 순간은 ‘표상의 세계’ 속에서 육체적 존재로 사는 인간에게 순간적인 예외적 인식상태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쇼펜하우어에게 있어서 미적인 인식은 ‘이념’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의지’ 없는 순수 정관 상태 속에서 만족감, 즉 무욕성 속의 만족감(das Wohlgefallen in Willenlosigkeit) 속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그가 일종의 “의지의 그림자”라고 기술한 무기물이나 식물, 동물처럼 ‘의지’가 객관화된 특정한 단계의 ‘이념’을 표현한 예술에서 어떻게 미적인 인식이 가능한가? 특정한 단계의 ‘이념’을 표현한 예술들에 있어서 ‘의지’의 객관화 단계가 높은 인간의 영역으로 갈수록 ‘의지’에 대한 표현은 더욱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개성적으로 출현한다. ‘의지’의 가장 낮은 객관화의 단계인 자연력의 긴장 관계를 표현한 건축물이나 혹은 생명력을 표현한 풍경화 혹은 정물화에서 의지의 싸움은 명백한 자기 인식과 개체성을 띠지 않고 출현한다. 그래서 순수 주관에 의한 ‘이념’에 대한 인식은 직접적으로 정관 상태, 즉 아름다움의 상태로 쉽게 나아간다. 예를 들어 주관은 무기체의 ‘이념’을 표현한 건축물이나, 유기체의 이념을 표현한 정물화, 풍경화를 바라보면서 그 사물의 가장 적합한 ‘의지’의 객관성 속에 몰입하게 하여 ‘의욕’이 휴식하게 되는 “무욕성 속에 만족감”이라는 정관 상태에 이르게 한다. 거기서는 ‘의지’ 없는 순수 인식에서 얻는 만족감, 즉 대상에 대한 몰입이라는 정관 상태에서 얻는 기쁨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7. 음악의 의의


 예술의 대상이 인간의 영역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의지’의 표현은 더욱 복잡하고 모순적으로 출현한다. 왜냐하면 동물, 인간의 영역에 대한 ‘이념’을 표현하는 예술일수록 직접적인 미적인 정관 상태에 이르게 하기보다는 개별적인 형태와 행위를 통해서 동물적이며, 인간적 삶의 본질인 ‘의지’의 투쟁과 불화로 인한 고통에 대한 인식이 우선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성의 이념을 표현한 회화나 특히 극예술은 인간의 인식과 의지의 분열과 투쟁으로 인한 고통을 인간 삶의 본질로 기술한다. 물론 그리스 조각 작품 같은 정적인 작품에서 개별적인 신체를 통해 표현되는 인간의 형상은 미적인 정관 상태에 이르게 하지만, 특히 비극과 같은 드라마에서는 인간의 행위와 추구로 인한 사건들이 무대 위에서 전개되자마자, 인간의 훌륭한 품성보다는, “부조리함, 가련함, 잔혹성, 야비함” 등이 인간의 본질적인 형상으로 더욱 자주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면 쇼펜하우어가 특별한 위치를 부여한 음악에서 ‘이념’에 대한 인식과 미적 인식은 어떠한가? 다른 예술들, 즉 건축, 회화, 시가 단지 ‘의지’가 가장 적합하게 객관화된 한 단계의 ‘이념’, 즉 ‘의지의 그림자’만을 이야기하는 데 비해서 음악은 ‘의지의 본질’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효과가 훨씬 더 직접적이며 강렬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세계는 육화(肉化)된 음악이며, 동시에 세계는 육화된 ‘의지’이다. 철학이 세계의 본질을 보편적인 개념을 통해 반복하고 표현하는 것이라면, “음악은 형이상학의 무의식적인 연습이며, 거기서 정신은 철학하고 있는 것을 모른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음악은 더욱 직접적으로 주관을 자의식에서 벗어나 기쁨, 착잡함, 고통, 경악, 슬픔, 격정이라는 육화된 정서를 통해 전체적인 ‘의지’의 세계에 몰입하게 한다. 음악은 가장 직접적인 무생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의지’ 그 자체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표현하기 때문에 더욱 심오하고 차원 높은 무의식적 ‧ 형이상학적 활동이라는 것이다.  


   

8. 숭고와 비극 예술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순수한 아름다움은 대상에 대한 ‘이념’을 직관하는 순간 ‘의지’는 멈추고 순수한 정관 상태에서 체험된다. 예를 들어 주위풍경이나 부드러운 빛으로 싸여있는 해 질 무렵의 광경은 인간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에는 투쟁 없는 순수한 인식이 존재한다. 거기서 그 대상의 이념에 대한 인식을 수월하게 하는 특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은 어떠한 저항도 받지 않고 관계들에 대한 인식에 봉사하는 의지로부터 멀어져서 인간을 오로지 순수한 인식의 주체로 남아 있게 한다. 그래서 그 자신은 의지에 대한 어떠한 기억도 지니지 않게 된다.     


 이러한 아름다움에 비해 숭고의 감정은 그 어떤 적대적인 대상에 대한 자기 ‘의지’와의 싸움을 거쳐 이를 넘어서는 의식적인 고양 과정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즉, 아름다움을 느끼는 마음의 운동은 대상으로 나아가는 몰입이지만, 숭고함에서는 의식적인 자기 ‘의지’에 대한 극복이 필수적이다. 자연의 관조를 통해 일어나는 숭고함은 인간의 신체를 위협하는 대상의 크기와 위력으로 인해 인간을 왜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축소하지만, 그를 현실적으로 위협에 빠뜨리지 않는 그러한 대상으로부터 일어난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자연의 위력과 관계하는 역동적 숭고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일어나는 위협적인 자연의 폭력 앞에서 인간은 자연의 모든 위력의 최소한 타격에도 부서질 수 있는 미약한 의지의 현상으로서의 개별자이다. 그는 자연의 이 엄청난 위력에 직면해서 점차 사라지는 무상한 존재라고 스스로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스스로가 인식의 영원한 고요한 주관으로서 모든 세계의 운반자이며, 자연과의 무서운 투쟁은 단지 그의 표상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때 그는 스스로 이념의 고요한 직관 속에서 이질적인 모든 의지와 모든 위험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는 바닷가에 몰아치는 자연의 위력 앞에서 개인이 단지 점차 사라지는 미약한 존재이며, 동시에 이러한 존재가 자기 표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의욕으로부터 해방된 평정한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또한 자연의 거대한 크기와 관계하는 수학적 숭고함에 대해서도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수학적 숭고함은 세계의 무한한 크기 앞에서 우리 자신을 마치 대양의 한 물방울처럼 무상한 의지의 현상이며, 이 세계의 모든 것이 단지 우리의 표상일 뿐이라는 인식을 통해 순수한 인식의 영원한 주관으로 스스로가 고양될 때 체험된다. 결국 대상을 통해 숭고함을 느끼는 순간에 바로 인간은 자신의 전체적인 본질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숭고의 감정은 표상으로서의 의지의 세계에 대한 무가치성을 깨닫고, 의욕으로부터 해방된 순수한 주관의 변화 속에서 느끼는 감정인 것이다. 숭고의 감정은 결국 의지의 현상이라는 표상의 세계에 대한 무가치성에 대한 인식과 이에 극복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아름다움과 구분되는 숭고의 경험을 자연에 대한 관조뿐만이 아니라, 예술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비극 예술을 통해서 더욱 설득력 있게 기술한다. 예를 들어 건축물이나 정물화, 풍경화 등의 예술 작품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이 우선하지만, ‘의지’의 객관화의 최고 단계인 인간성의 ‘이념’을 표현한 비극 예술에서는 세계에 대한 비극적 인식 과정을 통해 ‘의욕’으로부터 벗어나는 숭고의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자연의 무한성 앞에서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듯이, 우리가 비극에서 연기되는 인간 삶의 잔혹한 면을 관람하는 경우 우리는 삶의 ‘의지’를 절연하고, 삶을 더 이상 의욕을 내지도 집착하지도 않게 되는 것이다. 인간 삶을 표현한 드라마에서 모든 참혹함 속에서 서로 밀어내고 장악하는 인간 사이의 투쟁으로 전개되며, 인간의 행위와 추구로 인한 사건들이 무대 위에서 전개되자마자, 오히려 인간의 훌륭한 품성보다는, “부조리함, 가련함, 잔혹성, 야비함”이 인간의 본질적인 형상으로 더욱 자주 표현되는 것이다. 특히 쇼펜하우어가 드라마 중 특히 비극을 최고의 시적 성과로서 간주하는 이유는 세계와 현존재의 특성이 오히려 삶의 추한 측면, 이른바 이름 없는 고통, 인간성의 비통함(Jammer), 악의 승리, 조롱하는 우연의 장악, 구조될 수 없는 정의로운 자들의 행위를 통해 가장 잘 표현되기 때문이다. 비극에서 무섭게 전개되는 자기 ‘의지’와의 불화로 인한 고통이 인간 실존의 한계의 극한까지 이르게 되면, 관객은 오히려 ‘의지’의 싸움에서 벗어나 ‘의지’가 휴식하는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왜냐하면 비극은 결국 ‘의지’의 자율적인 자기 포기를 극의 종말로 표현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그 ‘의지’의 고유한 본질을 완전히 인식하게 하여 욕망의 체념에 도달하도록 한다. 결국 비극은 인간의 비극적 세계관에 대한 완전한 인식으로 이끌며, ‘의지’의 휴식(Quietiv)과 체념을 동반한다. 이처럼 특히 최고의 극예술로서의 비극은 인간 삶과 세계의 비극성을 ‘의지’가 객관화된 세계의 본질로서 인식하게 함으로써 ‘의지’의 체념을 통해 ‘의지’가 휴식하는 미적인 구원의 순간을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9. 고통의 윤리적 치유로서의 예술    

  

 예술은 ‘의지’가 객관화된 세계에 대한 본질을 직관적 방식으로 가장 직접적이며 투명하게 인식하게 해 준다. 예술에서의 미적 인식은 주관의 인과율에서 벗어나 세계의 근원인 ‘의지’를 자신과 같은 ‘의지’로 바라보게 함으로써 대상 속에서 몰입하는 정관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 준다. 이러한 이 세계 전체의 명석한 거울로서 예술의 인식 기능은 자기의식 속의 ‘의욕’의 수단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의지’와의 싸움이 없이도 직접적으로 대상 속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미적 상태의 반복적 경험은 사물의 세계를 본질적으로 ‘의지’라는 사실로써 명료하게 바라보게 할 뿐만이 아니라, 자의식에 벗어나 점차 세계와 하나가 되어가는 방향으로 마음을 넓어지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의식이라는 개성과 이기주의에 갇혀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보존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관계로서 개별 사물들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인식은 자신의 ‘의욕’을 부추기는 새로워진 동기(Motive)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을 통한 ‘이념’에 대한 인식은 ‘의욕’을 점점 이러한 관계로부터 고개를 돌리게 하여 미적 무욕 상태, 즉 각자의 ‘의욕’을 평정의 상태로 이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만이 순수하고 진실하고 심오한 세계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일시적으로나마 ‘의욕’의 휴식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위로(Trost)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삶의 고통으로부터의 도피나 위로의 순간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미적 경험을 통해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 전체 세계를 향해 심정을 확장하는 삶의 습관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미적 경험의 반복은 순간의 위로를 넘어서 일상적 삶에서 시간과 공간,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개별적 자아의 관점에서 벗어나 나와 세계가 본질적으로 ‘의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여, 점차 전체 세계의 근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의 확장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이란 특히 그의 숭고와 비극 예술의 영향에서 보여주듯이 ‘표상의 세계’ 속에서 개별자로서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론적 고통의 본질을 인식하게 하고 더 나아가 윤리적 실천적 치유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다. 특히 비극 예술에서의 숭고의 경험은 인간 삶의 본질로서의 고통에 대한 통찰과 더불어 금욕을 향한 윤리적 세계를 향해 변화시킬 수 있는 치유적 영향력을 지닌다. 인간성의 본질을 표현한 비극의 최종 목적은 인류의 고뇌를 의도적으로 재현하여 “삶의 의지로부터 전향을 촉구하는 것”이다. 즉 비극은 삶이 지닌 경악스러운 측면을 재현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인식을 통해 경악과 비참의 원인인 ‘의지’에 대한 집착을 정화하여 잠재우게 하는 윤리적 체념으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킨다. 즉 비극을 통해 ‘의지’의 좌절 가운데 ‘의지’를 드러내는 ‘의지’의 고유한 본질을 완전히 인식하게 되면, 사람들은 ‘의지’ 스스로 자기 포기를 재현하는 진정 효과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비극이 시 예술의 정상에 이르게 된 것은 비극이 큰 불행의 재현으로서 ‘의지’와 자기 자신과의 항쟁을 인류 고통의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가시화하기 때문이다. 비극을 관람한 관객은 고통의 원인인 모든 ‘의욕’과 모든 노력의 무의미성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고, 그 결과 ‘의지’ 자체가 폐기되는 지점까지 심화되면, 비로소 비극의 본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이다. 비극은 세계의 본질에 대한 포괄적 인식을 매개로 하여 ‘의지’의 자기 부정에 도달하여 ‘의지’의 체념에 이르게 하여 마음의 변화를 주는 치유의 과정과 동시에 금욕이라는 윤리적 세계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비극은 이처럼 관객에게 세계 본질에 대한 포괄적 인식을 매개로 하여 ‘의지’의 자기 부정을 통하여 ‘의지’의 체념 상태에 도달하게 하지만, 동시에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타자의 고통에 직접 참여하는 동정심(연민)을 계발하게 한다. 이러한 ‘표상의 세계’로서의 인간 삶에 대한 비극적 통찰은 결국 ‘의지’의 체념이나 개인적인 금욕으로 나아가게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게 하여 윤리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에 대한 동정심은 똑같은 ‘의지’가 객관화된 인간 삶의 고통에 대한 연대 의식을 통해 타자의 세계로 마음이 넓어지는 덕의 심성을 지니게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덕의 실행이란 타인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훌륭한 행동과 자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덕의 실행은 항상 타인의 고뇌를 자신의 고뇌와 직접적으로 일치시키는 동정심으로부터 비롯된다. 동정심이란 하나의 ‘의지’에 자신과 타자가 굴복하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모든 현존재가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는 마음의 상태에서 생겨난다. 즉 동정심은 항상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서 같은 삶의 본질을 인식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동정심은 개인의 이기심을 허물고 “심정의 진실한 선함”에서 오는 윤리적 행위, 즉 타인의 고통을 줄이는 자비행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동정심을 추상적 인식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나 인생의 과정을 통한 바로 직접적이며 직관적인 인식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의 행위와 사건을 통한 인간 삶의 비극적 인식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숭고함은 이러한 개체의 고뇌의 근원인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정심, 연민의 감정을 일어나게 하여 덕의 심정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이러한 예술이야말로 개인을 고통의 원인인 자기 집착이나 이기심으로 벗어나 타자적 실천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치유 방식이 될 수 있는 것이다.(공병혜, 2015. 참조)    


 

10. 마무리   

  

 예술은 단순히 예술가의 자유로운 창작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근원과 삶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 속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예술은 직관된 ‘이념’을 전달해주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인간 정신의 수준 높은 고양(die höhere Steigerung), 완전한 전개(die voiikommenere Entwicklung)이다. 이러한 예술의 가치와 중요성은 쇼펜하우어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잘 나타난다: “삶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단지 삶의 그림들만이, 즉 예술과 시의 아름다운 반영 속에서만 아름다울 뿐이다.” 예술은 삶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것인데, 이런 점에서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삶의 꽃’(die Blüte des Lebens)이라고 규정하고 있다.(이서규, 2009. 참조)


 ‘미적 인식’은 칸트의 ‘미적 무관심성’, 또는 관조이다. 미적 무관심성이란 대상의 아름다움을 판정할 때 요구되는 순수하게 심미적인 심리 상태를 뜻한다.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떠나 대상이 가지고 있는 내적 형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무관심적 관심’이다. 대상의 개념이나 용도 및 현존으로부터의 완전한 거리 두기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순수 미적인 차원에 대한 이러한 칸트의 이론은 쇼펜하우어에 이르러서는 예술미의 관조를 맹목적인 ‘의지’를 진정시킬 수 있는, 인간의 영적 구원의 한 가능성으로 평가하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불교에 심취한 그는 칸트의 ‘미적 무관심성’ 개념에서 더 나아가 ‘미적 무욕성’을 주창했다. 그에 따르면 이 세계는 ‘맹목적 의지’가 지배하는 곳으로, 거기에 사는 우리는 욕구와 결핍의 부단한 교차 속에서 고통받지만, 예술미에 도취하는 그 순간만큼은 해방을 맛본다. 즉 ‘의지의 폭정’에서 벗어나 잠정적인 열반에 도달한다.(교육 자료, 참조)     


          

《문장21》 2022. 가을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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