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페스코 비거니즘]을 선언한 지 1년 하고도 몇 개월이 흘렀다. 선언이라 하니 대단한 결심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내 주변에는 채식을 시작한 지 3년이 되어가는 애인과 동료들이 있었다. 이들과 동고동락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의 식습관을 공유하였고, "이 정도면 나도 페스코(채식주의자) 아닌가?"라는 질문이 번뜩이는 동시에 비건 지향인이라 스스로를 정의하였다. 물론 고기보다는 생선, 생선보다는 채소를 좋아하는 취향도 크게 한몫했고.
비거니즘 박람회인 비건페스타에 놀러(먹으러) 간다.
주변에 채식을 하는 사람들의 계기를 들어보면 공장식 축산의 현장을 매체를 통해 목격하거나 인간의 폭력성과 반윤리적 태도를 지탄하면서 채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라. 혹은 축산업계가 발생시키는 엄청난 탄소의 양에 경악을 금치 못해 시작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건강 상의 이유로 채식을 시작하는 사람도 많다.
언젠가 인류 문명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유구하게 풀어낸 강의 내용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하나 있었는데,
현재 지구는 전체 생물 종의 1%가 살아있는 모든 개체 수 99%를 차지하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장난처럼 500년 뒤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이대로 가다간 500년 뒤 인류를 장담할 수 없으니까..) 21세기를 닭이 지배한 시대로 정의 내릴 것이라 얘기한다. 실제로 땅 위에는 밀과 보리, 쌀이 덮여있고 돼지와 소, 닭들이 점유하고 있다. 공원 나무들도 인간이 관리하기 편한 소수 개체에 불과하다. 인간의 공간에 같이 살 수 있는 바퀴나 개미, 모기, 말벌들이 곤충계를 지배하고 있고. 윽.
인간이 생태계를 정복한 건지, 유발 하라리의 관점처럼 소수 1%의 생물 종이 전체 생태계의 99%나 차지할 수 있게끔 종족번식의 도구로 인류를 노예로 전락시킨 건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주변 친구들을 좇아 채식을 시작한 사연을차치하고서 굳이 비건을 시작한 이유를 뽑자면 편하게 먹고, 금방 그 과정을 잊어버리는 망각의 과정이 싫었다.기왕 먹는 끼니를 때운다는 느낌으로 해치우고 싶지 않았다. 내가 먹는 음식에 무엇이 함유되어 있고, 어떤 과정을 통해 내 입으로 들어오는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가장 큰 이유요, 공장식 축산과 기후위기와 같은 주요한 이슈들 또한 배워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는 일상생활을 하기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다고 하는데, 비건 지향인으로 살아가는 건 정말, 꽤 재밌다.
한 끼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그 한 끼를 나의 기준에 맞게 잘 먹었다는 일상적인 경험은 자존감을 높여주는 버튼이다.
직접 만들어먹는 페스코비거니즘 음식들
비거니즘은 허용하는 육식의 범위에 따라 단계가 나뉜다. 오보락토, 비건, 페스코 등등 단계에 따라 이름도 다르게 불리는데 요즘엔 검색만 해도 바로 나온다. 내가 지향하는 페스코 비거니즘은 생선과 유제품, 달걀 등을 허용하는 가장 약한(?) 단계다. 많은 이들이 처음 채식을 시작할 때 페스코 비거니즘을 선택한다.
육고기만 안 먹는 것도 정말 쉽지 않다. 대부분 과자, 소스, 요리에 들어가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을 찾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습관처럼 성분 분석표를 들여다보고 식당에서도 고기가 들어가는지 한번 더 묻게 된다.
얼룩_비거니즘 / 캔버스에 아크릴 2021.10.
그러나 고백하자면 난 핑계가 정말 많은 채식주의자다.
상황에 너그러운 타입.
먼저 할머니와 엄마가 해주시는 음식은 묻고 따지지 않고 먹는다. 일주일에 겨우 한 두 끼니 같이 하는데 부러 신경 쓰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다는 핑계. 그리고 말씀드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손주 놈 단백질 보충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주시는 마음을 저버릴 수 없다는 핑계 둘. 시골에 사는 할머니와 부모님이 해주시는 고기는 모두 로컬푸드 마켓에서 사 오는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변명 하나.
두 번째로 음식물쓰레기를 만들지 말자는 주의다. 실제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상황인데, 당연히 고기가 들어가지 않아도 될 식당 메뉴에 고기가 들어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프랜차이즈 음식점이 그렇다. 완제품을 쓰는 새우볶음밥, 곤드레나물밥. 이런 음식에 왜 햄이 들어가는지 난 알 수가 없다. 이 경우 난 그냥 먹는다. 음식물 쓰레기를 잔뜩 만드는 것보다야 먹는 것이 낫다는 또 하나의 변명 추가. 죄책감을 등에 업고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다.
지금은 극복했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순대엔 굴복했다. 떡볶이(국민 비건 음식)를 먹을 때 옆에서 순대를 먹고 있노라면 참지 못했다. 최애 음식을 참을 수 없었다는 비겁한 변명..
그런데 오히려 일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더욱 적극적으로 채식 지향인임을 알린다. 비거니즘 이슈를 던지기도 하고, 채식 지향인이 먹을 수 있는 다과류를 제공하거나 요구한다. 회식을 할 때도 비건 지향인들이 소외되지 않을 식당 선정에 최선을 다한다.모름지기 채식주의자는 적극적으로 '티'를 내면서 채식의 매력을 주변에 어필하는 것이 마땅하다.
비거니즘에 대한 인식이 퍼져 많은 사람들이 채식인들의 생활양식을 이해하고 함께 식탁을 꾸려가고 있다. 소수 몇몇 사람들이 비거니즘을 마치 금욕주의로 오해하고 "난 고기가 너무 맛있어서 채식은 못해~(찡긋)" 농담처럼 툭툭 던지는 발언들만 아니면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큰 불편함도 없다.
인권학자 조효제 선생은 인권의식 향상을 저해하는 요소 중 하나로 "사회운동가의 모순 이론"을 말씀하셨다. 사회운동가로 인식되는 순간 그 사람에게 가해지는 윤리적 잣대와 기준이 상당히 높아지는 현상이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사회적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런 말들을 질타처럼 듣게 된다면 누가 세상을 바꾸는 실천을 시작하겠는가, 이 말이다.
물론 이것 또한 핑계쟁이 채식주의자의 궤변일 수도 있겠지만 완벽한 채식주의는 없다. 친구들은 나를 "플렉시테리언"이라 부른다. 유동적으로 알아서 채식을 선택하는 부류의 채식인이란다. 참 사려 깊은 채식인들이 나와 같은 핑계쟁이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분류도 만들어 놓았다. 내 주변에는 일주일에 하루 비건 식단으로 밥 먹기. 회식 자리에서만 고기를 허용하는 사람도 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고기류(시즈닝)은 그냥 먹는 분도 있단다.
본인이 직접 선언하는 기준과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습관. 또 그것이 나와 세상을 위한 작은 실천이라는 점이 가져다주는 소소한 만족감. 만약 주변에 채식인들이 늘어난다면 그것만큼 재미난 일도 없다.무엇보다 이젠 채식을 한다는 것이 조금은(?) 멋진 습관이라는 인식이 퍼지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나는 핑계쟁이 채식주의자겠지.
하루에 적어도 한번 "오늘 뭐 먹지?" 질문할 텐데. 나와 세상을 위한 작은 한 끼 식사를 차려먹는 것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