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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Feb 23. 2021

시각언어 서론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X축> 이 나온지 8년이 지났습니다. 이 책은 좋은 디자인의 큰 틀의 조건에 대한 사유였습니다. 지난 8년동안 저는 좀 더 현실적으로 나아가 구체적으로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지 고민을 이어왔습니다. 좋은 디자인의 현상을 살피면서 좋은 디자인에 대한 취향이 다 제각각이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좋은 디자인의 현상에서는 공통점을 찾을 수 없었죠. 그래서 저는 좋은 디자인이 만들어지는 바탕, 아니 디자인이라는 행위 자체의 바탕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려운 접근이었습니다. 왜냐면 그 바탕은 바로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이 '언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물론 소통적 측면에서 디자인이 언어라는 말은 흔하게들 사용합니다. 여기서 소통은 '일상의 소통'이 아니라 '특별한 소통'을 의미합니다. 예술이론에서 종종 언급되는 소통의 극대화라고 할까요. 그래서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과 글과 연결시키지 못했죠. 하지만 디자인은 특별한 소통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생활의 소통 그 자체였습니다. 일상의 상품과 광고, 서비스, 제품, 건축 만이 아니라 말과 글, 그림 등 일상의 감각적 기호들이 모두 디자인이었습니다. design은 말 그대로 de+sign, 기호를 만드는 것이니까요.   

일상의 기호를 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예술과 디자인의 역사적 맥락만이 아니라 사회적 혹은 사상적 배경을 아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사회나 사상적 이념들 모두 현상들이니까요. 기호를 알기 위해서는 훨씬 더 깊숙히 들어가야 했죠. 객관적인 입장에서 인간만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에서의 사람을 이해해야 하고, 말이 만들어지고 기호가 형성되는 과정, 구체적으로 그림이 그려지고 문자가 만들어지는 맥락 여기에 문법(말차림법)까지 섭렵해야 했습니다. 개별과 보편, 구상과 추상을 엄밀히 구분하고, 사람의 사유방법을 이해하고, 생물학과 신경학, 물리적 성질을 기호에 맞추어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오랜시간 고민하고 강의하고, 생각을 재구성하면서 이제야 누군가에게 보여줄만한 정도로 정리가 된 듯합니다. 어쩌면 지난 5~6년의 강의는 이번 책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자 실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니다. 그 사이 여러분들의 도움을 받았고, 또 그 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온것 같습니다. 너무 많아서 한분한분 호명을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이 책을 집에 은유한다면 저와 교류하는 분들 모두가 이 책에 하나 혹은 여러 벽돌을 놓아주셨습니다. 이 책은 많은 분들의 생각이 저에게 들어와 함께 쓰여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에서 제시한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함께하는 디자인'입니다. 수평적으로 자신의 범위를 넓히고 그런 범위가 서로 접점을 이루어 위를 지향할때 서로의 한계를 넘는 성과가 나올 것이라 도식적으로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최봉영 선생님을 만나고 저의 이런 생각이 디자이너로서만이 아니라 한국말을 사용하는 한국사람이었기에 형성된 태도란 것을 알았습니다.  

한국말에서 수평은 '바'라고 말합니다. '바다'는 일종의 수평선입니다. '바'가 수평이라면 '다'는 선입니다. 한국말에는 '다'와 '지'는 '먹다' '먹지'처럼 문장을 종결하는 대표적인 토시말(겿말)입니다. '지'는 계속 진행되는 상태를 말하고, '다'는 진행이 완결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다'라고 말하면 마치 벼랑끝처럼 끝선에 도달해 상태가 종결되었음을 의미하죠. 그래서 '바다'는 육지에 바라볼때 멀리 보이는 수평의 끝선입니다. '바닥'은 그 끝선까지 이어진 평평한 면이고, '바닷가'는 '바닥+가'로 육지와 바닥(바다)의 경계를 의미합니다.

사람의 특징은 두발 보행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위아래의 수직적 상태를 중시합니다. 어떤 기준을 세울때 깃발을 꽂는 상상을 하죠. 기준을 되는 장소나 시간을 한국말로 '여기' '저기'입니다. 이때 '기'가 바로 수직입니다. '기'는 깃발처럼 수직선입니다. 꽂꽂한 '기'가 곡선으로 울면 '기울기'라고 말합니다. 두개의 기가 서로에게 기울선 위쪽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만난 것이 지붕입니다. 최초의 지붕은 두개의 '기'가 기울어서 만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인디언 천막처럼요. 옛날에 지붕을 '서'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지붕을 세우는 나무를 '서까래'라고 말하죠. 두개의 '기'는 서있기에 불안합니다. 적어도 세개의 '기'가 있어야하죠. 그래서 '셋'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유능한 세사람이 모이면 못할일이 없다고 하죠. 실제로 세개의 '기'가 기울어서 서면 안정적으로 서있습니다. 

기가 많아질수록 안정감은 더해집니다. 기가 많아지면 아래의 모양은 삼각형에서 네모, 팔각형, 십육각형 64각형... 점점 원으로 수렴되겠죠. 몽골의 '게르'와 같은 초원의 전통가옥들의 제작과정을 보면 길다란 나무들을 위쪽으로 기울려 지붕을 만듭니다. 아래는 원형모양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이 원형의 기들을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울타리'의 '울'과 바탕을 함께합니다. 이 '울'도 둥그런 천막지붕을 상상하시면 됩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우리'라고 부른 것이죠. 

동서양 모두 '중용'을 중시합니다. 이때 '中'을 한국말로 '가운데 중'이라고 말합니다. '가운데'의 짜임은 '가+운데'입니다. 원에서 볼때 '가'에 있는 것들이 모여 '운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서양이나 중국에서 말하는 중심점, center와는 다른 의미죠. 한국말로 중심점은 '한가운데'이니까요. 한국사람이 '中'을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운데라 말하는 이유는 한국사람에게 중용이란 한가운데가 아니라 함께 가를 이루는 전부를 의미합니다.   

말은 크게 subject와 object, verb의 관계입니다. 번역하면 주어와 목적어, 동사의 관계입니다. 한국말 주어와 목적어, 동사의 관계는 영어와 중국어와 크게 다릅니다. 영어와 중국어는 '주어+동사+목적어'이고 한국말은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서입니다. 영어와 중국어는 문장의 순서로 볼때 주어가 어떤 행위를 하고 목적어가 등장합니다. 즉 주어가 능동적으로 어떤 대상에 어떤 행위를 가하는 느낌이죠. 반면 한국말은 주어와 목적어가 먼저 말해지고 맨 나중에 동사를 말합니다. 이는 주어가 어떤 대상에 능동적으로 행위한다기 보다는 주어와 목적어가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문장 구성상 영어와 중국어는 말하는 주체가 능동적이고 한국말은 말하는 주체가 어떤 대상과 함께하는 상태입니다. 원을 상상해 보세요. 서양과 중국사람은 말하는 주체가 가운데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반면 한국사람은 주체가 한가운데 있지 않고 가에 둘러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주체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입니다. 둘일수도 있고, 셋일수도 있고, 훨씬 만들수도 있습니다. 가령 영어에서 'I go to school'이라고 말할때 주체는 'I' 하나이고 'go' 뒤에 나오는 말들은 모두 주체가 행위하는 대상들입니다. 반면 한국말은 '나는 학교에 간다'라고 말할때 '나'와 '학교'는 각각의 주체로서 '간다'라는 현상을 함께하는 모습이죠. 주체는 더 많이 추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친구랑 학교에 간다" "나는 친구랑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나는 친구랑 버스를 타고 선생님을 만나러 학교에 간다" 이런식으로 주체는 '나' '학교'에서 '친구, 버스, 선생님'까지 계속 늘릴 수 있죠. 이 주체들은 모두 '간다'라는 현상을 함께하는 것이죠. 그래서 최봉영 선생님은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은 '함께성'을 중시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라는 말이 흔하게 쓰이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우리'를 중시합니다. 이를 다른말로 하면 '함께성'입니다. 제가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X축>에서 주장하는 것이 한국사람의 정서에 배어 있는 것이죠. 지금까지 보았듯 한국사람에게 이런 정서와 태도가 배어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말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국말에는 디자인의 정서가 깊게 배어 있습니다. 저는 이를 단초로 디자인의 언어 '시각언어'의 보편성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문법에는 '추상명사'라는 말이 있고 이를 '추상어'라고도 말합니다. 이는 별로 좋은 언어선택이 아닙니다. 언어는 구상과 추상의 관계가 아니라 개별과 보편의 관계입니다. 추상은 일종의 시각적 단순화인데 이 단순화된 형태가 보편적 소통을 이끌어 내기에 이런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추상성과 보편성의 관계는 엄밀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분이 시각언어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단초입니다. 


저는 최봉영 샘 덕분에 한국말과 보편성을 단초로 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또 말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앎을 바탕으로 디자인의 언어, 시각언어의 바탕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시각언어는 대부분 현상적 측면에서 재밌는 실험놀이로만 여겨져 왔습니다. 지난 20세기 현대예술에서 추구한 아방가르드한 형식주의 예술들은 모두 현상적인 실험놀이입니다. 이 재밌는 실험놀이는 이제 한계에 다다른듯 싶습니다. 그 이유는 이 실험놀이는 왠지 예술가와 디자이너의 특별한 활동이나 특권처럼 여겨지고 있거든요. 그래서 이를 보고 즐기는 독자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집니다. 쉽게말해 이해와 소통이 안되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예술과 디자인의 시각언어 실험놀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계에 다다른 실험놀이가 안타깝습니다. 이 실험놀이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끊어진 다리, 예술가와 디자인 그리고 이를 즐기는 사람들의 이해와 소통을 연결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이들 모두가 함께하는 바탕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바탕을 공유하면 왜 예술과 디자인이 이 실험들을 해왔고, 그것이 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되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지난 100년의 예술과 디자인 실험들의 바탕이 무엇인지 밝히고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한 이론적 토대를 세우고 마련할 때가 왔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예술가와 디자이너, 관람자와 독자 모두가 공유하는 이론적 바탕을 마련했습니다. 이를 시각언어 바탕이론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이 바탕이론은 저의 오랜 숙원이었습니다. 이 숙원이 이성민 샘을 만나게 되면서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졌습니다. 한국말에 눈을 띄게 해주신 최봉영 샘도 이성민 샘 덕분에 알게 된 인연입니다. 

지금까지 디자인이 학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림=이미지'과 '그릇=제품' 그리고 '그것=서비스'를 다루는 예술과 디자인이 과연 '말과 글'을 다루는 인문학과 과학과 언어적 바탕을 함께 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때문입니다. 이미 다른 학문분야들은 말과 글을 공유하는 탄탄한 학문적 바탕을 갖고 있는데, 이 바탕이 예술과 디자인과 연결될 수 있을까요. 저는 여러날을 고민했지만 그 고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이성민 샘은 저에게 한줄기 빛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성=생각의 빛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언어학과 '기본층위 범주'라는 개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이 기본층위 범주로 그림과 글이 연결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랜시간 영어, 한자, 한국말의 말차림을 연구하신 최봉영 샘은 언어=말의 바탕이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이 바탕에 '그'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말에서 '그'는 경험을 담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말로 '것'은 모든 존재를 의미하기에 '그것'은 모든 존재를 담을 수 있는 말이죠. '그'의 '그것'에는 '그림' '글' '그릇'이 모두 포함됩니다. 즉 모두 '그-가족'인 셈이죠. 이 사실은 그릇(조각, 제품)과 그림(회화, 그래픽)을 다루는 예술과 디자인이 글(말, 생각)을 다루는 다른 학문들과 한가족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를 통해 예술과 디자인도 비로소 학문적 바탕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기본층위 범주'와 '그-가족'을 갖고 어설프게나 예술과 디자인이 공유할 수 있는 바탕이론을 만들었습니다. 만약 예술과 디자인이 공유하는 바탕이론이 탄탄하게 마련된다면 더욱 다양한 실험놀이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실험놀이는 언어놀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언어놀이는 과거처럼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저들끼리 공유하는 놀이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하는 놀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예술과 디자인이 일상에서 누구나 즐기는 활동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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