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언어는 전체가 부분으로 쪼개진 상태에서 부분을 재조합해 새로운 전체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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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아이콘, 추상은 서로 형태에 대한 태도가 다를뿐 결국 모듈 요소로 분해되어 상호적으로 대응하는 패턴 관계다. 가령 수학에서 10이란 숫자가 2와 3 그리고 5가 더해진 것처럼. 10=2+3+5 여기서 10은 사진이고, 2와 3, 5는 일종의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을 응용해 디자인은 이미지를 모듈적 부분으로 해체해 다시 전체적인 이미지로 재조합할 수 있다. 해체된 모듈은 무척 다양한 이미지 조합이 가능해진다. 의미적으로는 서로 달라보일지라도 느낌의 뉘앙스는 일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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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삼 모형에서 아랫변의 스팩트럼은 사진에서 아이콘으로 패턴관계 성형이 높다. 이 변의 형태변화는 의미의 초점화와 관련이 깊다. 어떤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부각할 것인가에 따라 이미지의 생략 여부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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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아랫변 구상적 의미와 윗 꼭지점 추상의 스팩트럼은 기존의 의미가 해체되고 의미와 형태의 패턴관계가 두드러진다. 이 관계는 크게 두개의 유형으로 분리된다. 하나는 사진과 추상의 관계, 다른 하나는 아이콘과 추상의 관계다. 먼저 아이콘과 추상의 관계는 그림문자에서 소리문자, 나아가 면에서 선 그리고 점으로 분해되는 산술과 기하학적인 수학적 패턴으로 연결된다. 아이콘은 형태 자체가 단순하기에 형태 분해가 단순하고 패턴 규칙을 설정하기가 비교적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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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진과 추상의 관계는 여전히 그 분해와 관계 설명이 모호하다. 영상은 경험을 순간적 사진들로 쪼개어 재구성한 상태이기에 추상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좀더 의미가 사라진 형태, 아니 형태와 의미 관계의 자율성이 높은 추상적 형태와 직적 경험과의 스팩트럼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과연 경험이 어떻게 추상으로 쪼개질 수 있는지 실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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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는 사진을 아이콘으로 전환하고 그 아아콘을 추상적 형태로 분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만약 사진에서 바로 추상적 형태로 분해가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형태적 의미를 무시할 수 있을까? 질감과 무게감 등 감각경험적 본질을 해치지 않는 분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분해는 분명 아이콘적인 분해와는 차원이 다르다. 직접적인 경험, 살아있는 감각 그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이것은 어쩌면 의미에 초점을 버리고, 전체적인 의미를 모두 가져가면서 동시에 형태적 해체를 진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형태는 시각적 감각만이 아니라 청각, 촉각, 미각, 후각 등 우리 몸의 아주 복합적인 공감각이 모두 고려되는 상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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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두가지 모듈형 디자인을 상상할 수 있다. 아이콘에서 추상으로 가는 타이포그래피적 모듈형 디자인, 그리고 사진에서 추상으로 가는 감각분해형 모듈형 디자인… 전자의 경우 아주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지만, 후자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과연 이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감각을 분해하고 재조립한다는 것은 복합적인 신경계를 갖춘 인간 고유의 정신과정인데… 이걸 시각언어적으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방법론은 유사한데… 경험하지 못한 영역이기에 이미지로서 상상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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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수학 패턴의 경우, 추상적 1은 이렇게 구성된다. “영희가 사과 10개를 사와서 냉장고에 넣었어, 그런데 철수가 배고파서 사과를 5개 먹었고, 다시 아빠가 3개, 그리고 엄마가 1개를 먹었어. 그럼 사과가 몇개 남았을까?” 이 사고력 수학 과정이 바로 사진과 추상의 스팩트럼이다. 시공간적 경험이 사건과 이미지로 쪼개지고 분해되어 결국 하나의 형태로 귀결되어 대응되는. 어쩌면 여기에 우리가 가야할 현대적 미술세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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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앞으로 현대미술의 길은 여기에 있다고 믿는다. 위 모형에 보면 그 영역의 만화 캐릭터는 거의 없다. 아직 우리가 이미지로서 가보지 못한 영역, 바로 사진(경험)과 추상의 스팩트럼이 현대 미술의 이미지 영역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