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김종균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디자인 역사책을 기획하고 있는데 혹시 소개해줄만한 출판사가 없는지… 그때 나는 알고 있던 출판사 연락처를 드렸다. 시간이 지나 몇 달 전 다시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책이 출간되었다며. 반가운 마음에 책을 보니 내가 소개한 출판사가 아닌 ‘이유출판’에서 출판되었다. 이유출판은 대전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님이자 타이포그래피 전문가인 유정미 선생님이 운영하는 출판사이다. 역시 전문가가 전문가를 알아보는구나! 비록 도움은 못드렸지만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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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자인사> 이후 20여년이 흘렀고, 김종균 선생님은 세계 디자인사를 관통하는 책을 썼다. 수년간 함께 디자인 평론 및 한국디자인사학회 활동을 해왔고, 비록 무산되었지만 내가 속한 경향신문에 필진으로 소개하는 등 나름대로 김종균 선생님을 응원하는 입장이었기에 나는 간단하게 이 책을 마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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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내주신 책은 보관하고 새로 책을 한권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으며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몇년전 김종균 샘이 영국에서 유학하실때 유튜브에서 미술과 디자인 역사에 대한 줌강의를 하신적이 있었다. 나는 종종 그 강의 녹화를 즐겨보곤 했는데 그때 강의에서 말씀하시던 말투가 그대로 텍스트에 녹아 있었다. 김종균 선생님의 음성으로 책을 읽는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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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접근을 언어기호학에선 ‘파롤(parole)’이라고 한다. 언어학의 구조를 만든 스위스 철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랑그(langue)’와 ‘파롤’로 구분했는데 랑그가 언어 그 자체라면 파롤은 목소리와 성향 등 그 언어를 말하는 사람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다. 디자이너식으로 말하면 랑그는 어도비 포토샵이고, 파롤은 디자이너가 포토샵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보통 인문학책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파롤적 성격을 지우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이기 위해 랑그에 가깝도록 노력을 하는데, 김종균 선생님은 자신의 파롤적 성격을 지울 생각이 없다.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주욱 늘어 놓았다. 이렇게 말하기 형식으로 글이 쓰여지면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장점이 있는 반면 텍스트가 여러 방향으로 흐르면서 앞뒤 논리적 정합성이 흐트러지는데…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책은 일관성과 정합성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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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이 쓴 디자인 역사책은 흔치 않다. 내가 인상깊게 읽었던 디자인 역사책은 나의 석사 논문 지도교수셨던 정시화 선생님이 쓰신 <산업디자인 150년>이다. 이 책은 1830년부터 1980년까지 거의 10년 단위로 미술과 디자인에 있었던 다양한 사건을 꼼꼼히 기록했다. 젊은시절 나는 이 책을 몇차례 탐독하고, 이 책을 근거로 많은 글을 썼다. 서양사람이 쓴 다양한 디자인 역사책이 있었지만 이 책만큼 디자인 분야에서 일어난 사건을 꼼꼼히 기록한 책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이 책이 디자인 사료였고 보고였다. 누군가와 논쟁을 하면 반드시 이 책에서 근거를 찾았다. 이 정보를 토대로 인터넷이나 필립 맥스의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 등 특정 분야를 다룬 역사책에서 교차 검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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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디자인이론에 관심을 가지면서 크게 디자인역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오랜만에 김종균 선생님의 유튜브 디자인 강의가 재밌었고, <모던데자인>도 복습차원에서 읽기 시작했다. 그래서 왠일. 생각보다 재밌다. 파롤 방식으로 말맛나게 글을 쓰셨지만, 역시 듣는맛과 읽는맛은 차이가 있다. 게다가 한국디자인 역사의 선구자이자 대가답게 보편적 디자인역사에 곁들여서 간간히 등장하는 한국디자인에 대한 내용은 아주 흥미롭다. 한국사람의 관점에서 세계디자인 역사를 보고, 다시 이를 한국디자인 역사와 비교해 보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이런 접근은 참 새롭고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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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균 선생님의 <한국디자인사>를 보면 역사에 대한 본인의 관점을 자세히 설명한다. 이건 아주 중요하다. 서양미술사는 쓴 곰브리치도 서론에서 자신의 관점에 대해 자세히 밝힌 다음 설명을 시작하는데… 나는 디자인사 강의를 할때 1950년대 쓰여진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는 지금에 와서 보면 많은 사실관계가 틀리지만, 지각심리학, 즉 게슈탈트 이론에 근거한 그의 역사적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며 훌륭하다는 점을 강조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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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사실만큼이나 관점도 중요하다. 나는 비록 디자인 역사책은 쓰지 않았지만 <역사는 디자인된다>는 나름의 역사철학 책을 쓴 경험이 있다. 이 시절 한창 시각예술의 이론적 토대를 고민하면서 기초 철학과 역사학 등에 관심이 많았다. 나는 <역사는 디자인된다>에서 패턴과 구조를 중요시 여기는 그래픽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을 취했는데 이 책은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디자인철학에 근거한 역사철학책이라 볼 수 있다. 이 책을 쓸 때 아날학파 창시자 마르크 블로크와 외교관 출신 연구자 E.H.카, 과학적 방법론으로 역사를 접근한 존 루이스 개디스의 역사철학을 근거로 삼았다. 이들은 모두 역사는 사실의 나열보다는 관점과 해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나는 이들의 철학을 읽으며 디자이너 또한 모든 분야에 있어 자신만의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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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국디자인사>로 돌아오면 김종균 선생님은 이 책의 서론과 후기에서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만큼 선생님도 디자인역사에서 사실만큼이나 관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한국 디자인사는 힌국 ‘정치-경제구조'의 변화 관점에서 한국디자인의 흐름을 기록하고 해석했다. 디자인 역사 이야기를 할때면 늘 강조한다. 서점에 가면 다양한 미술사, 디자인사책이 있지만, 역사가가 자신의 관점을 상세히 밝히고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역사책은 흔치 않다고.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처럼 <한국디자인사>도 사실과 더불어 관점 또한 또렸한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한국디자인 역사에 있어 고전의 반열에 오를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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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는 이정도로 하고 이번에 나온 책에 대한 간단한 의견을 보태면, <모던데자인>은 한국디자인 역사학자 관점에서 세계 디자인 역사를 조망한 아주 독특한 책이다. 정시화 선생님의 <산업디자인 150년>이 디테일 면에선 뛰어나다면 김종균의 <모던데자인>은 관점에서 뛰어나다. 나의 디자인 역사 공부 맥락으로 볼때 <산업디자인 150년>과 <모던데자인>은 하나의 세트로 묶어서 읽으면 아주 좋은 디자인 역사 공부 교과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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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를 보면 작가의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목차는 크게 6개로 구성된다. 디자인 이전 시대를 다루는 첫번째 챕터 제목은 ‘천국의 예술’이다. 근대 이전이 종교 중심의 예술 행위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두번째는 ‘계몽과 평등’이다. 예술의 목적이 계몽이라는 것은 유지되지만, 예술의 창작과 소비에 있어 평등한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세번째 챕터 제목은 ‘합리주의와 아방가르드’이고, 네번째는 ‘순수기계미학’, 다섯번째는 ‘스타일과 감성’, 마지막은 ‘한국의 모더니즘’이다. 모두 제목에서 세계 디자인의 흐름과 태도를 읽을 수 있고, 마지막으로 <한국디자인사> 저자답게 세계디자인 흐름이 한국 디자인역사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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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디자인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최근 <모던데자인>이라는 디자인역사 책이 나왔습니다. 이 책은 한국디자이너와 연구자가 세계 디자인을 어떻게 조명하고, 이를 근거로 한국디자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데 중요한 관점을 제공하는 책입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을때 책에 나오는 디테일한 사실에 집착하지 말고, 21세기 전반을 살아가는 한국디자이너 입장에서 지난 200년 디자인이라는 현상이 어떻게 시작되고 언제 어떻게 한국에 들어와서 소비되었는지 큰 틀의 흐름을 살피는 계기로 삼으면 좋을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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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김종균 선생님 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책도 정보도 변변치 않았던 시절이었음에도) 선생님이 평생 어떻게 공부하셨을지 그 노고가 느껴집니다. 박사학위를 받았음에도 살기 위해 특허청에서 심사관으로 근무하시고, 그럼에도불구하고 디자인연구자이자 역사학자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이렇게 큰 족적을 남겨주시니 같은 분야의 후배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선생님의 족적과 결과물은 척박하고 빈약한 디자인 연구 분야에서 단지 디자인이 좋다는 이유로 디자인을 연구하고자 하는 미래의 후배들에게 큰 귀감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