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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은 나를 어떻게 설계하는가

데이비드 이글먼(김승욱 옮김)

by 윤여경

대학교 1학년 무료한 대학생활을 이어가다 우연히 학교 밴드의 공연에 이끌려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노래도 못했고 할 줄 아는 악기가 없던 나는 떠밀리듯 드럼 파트를 맡게 되었다. "손목에 힘을 빼!" 동아리 선배는 항상 드럼 스틱으로 내 손목과 팔, 어깨를 툭툭 치며 힘을 빼라고 지적했다. 고무타이어를 치며 처음 4연음을 연습했던 나는 이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연습을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면서 어깨부터 차츰 힘이 빠지고, 팔과 손목에도 아무런 힘을 주지 않고 4연음, 3연음 등 다양한 방식으로 타이어를 때릴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도 나는 스틱으로 타이어나 허벅지를 때리곤 했다. 이 후 수년간 나는 학교 밴드 드러머라는 자부심으로 대학생활을 했다. 이 자부심의 근원에는 내가 드럼을 잘 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악기를 배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몸에 힘을 빼는 것이다. 두 발 자전거를 배울 때 몸에 힘을 주면 뒤뚱거리지만, 익숙해지면 몸에 힘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타게 된다. 운동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타자는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배트를 휘둘러야 빠른 공에 대응할 수 있고, 체조 선수가 고난도 동작을 하려면 몸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올림픽 등 국제 경기에 나오는 운동 선수는 모두 몸에 힘을 빼는 오랜 훈련을 한다. 몸에 힘을 뺀다는 것은 곧 그 동작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내 몸이 알아서 동작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연습이며 훈련이다. 즉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행동을 해야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도 나는 손가락에 힘을 빼고 키보드의 어디를 치는지 의식하지 않으며, 습관화된 무의식적 동작에 의지해 내가 말하고 싶은 문장을 타이핑하고 있다.



무의식의 중요성을 깨닫다

사람들은 보통 의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의식은 아주 중요하다. 나도 인간에게 있어 의식이란 무엇인지 상당 기간 고민하며 내 나름의 답을 찾아가고 있다. 의식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면서 나는 '무의식'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고, 무의식에 관련한 책을 몇 권 주문해 읽기 시작했다. 그 첫 책이 바로 데이비드 이글먼(David Eagleman)의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이다.

이 책에서 의식은 무의식의 CEO라며 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의식은 무의식이 하는 일 대부분을 모르고 무의식의 결정을 해석할 뿐이라고 말한다. 사장님은 결재만 할 뿐 대세의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는 의미다. 실제로 사장님은 무의식이 무엇을 할지 그 방향을 결정할 뿐 그 대답은 직원들이 한다. 아무리 사장님이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직원들이 태업이나 파업을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거꾸로 뜻밖에 직원들이 너무 잘하면 사장님은 그저 상징적으로 존재하며 직원들의 훌륭한 치적을 누릴 뿐이다.

몸에 힘을 빼고 하는 행동은 모두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내 행동을 맡기는 행위를 말한다. 데이비드 이글먼은 이런 상식적인 내용을 섬세한 과학으로 잘 풀어내는 젊은 신경과학자이다. 그는 우리 몸에서 무의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다양한 사례와 관점을 통해 설명한다.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사례는 병아리 감별사 이야기이다. 병아리 감별사들은 갓 태어난 병아리의 항문을 보고 암컷과 수컷을 구분하는데, 흥미로운 점은 무엇을 보고 그런 확신이 드는지 설명하지 못한 채 어떤 느낌만 가지고 병아리 암수를 감별한다는 것이다. 병아리 감별사가 되기 위해서는 몇 주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이들은 선배 병아리 감별사가 하는 것을 관찰하고, 이들의 몇 가지 조언을 듣고 병아리를 감별한다. 처음에는 실수가 많지만 몇 주가 지나면 거의 100% 확률로 병아리를 감별하게 되는데, 이들도 자신들이 어떤 근거로 병아리 암수를 감별하는지 뚜렷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디자인과 예술 교육도 병아리 감별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소설 《광장》으로 유명한 최인훈의 에세이를 엮은 《길에 관한 명상》의 흥미로운 장면이 떠올랐다. 한 강연에서 질문을 받는다. "선생님, 문학(예술)을 교육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최인훈의 대답은 아주 흥미로웠다. "저도 예술은 교육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단 시작한 만큼 하는 데까지 해보는 거죠." 나는 이 대답을 읽으면서 디자인 교육자로서 예술과 디자인 교육에 갖고 있던 의구심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그래, 자꾸 설명하려 하지 말고 일단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

물론 병아리 감별과 디자인 교육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병아리 감별은 답이 있지만 디자인은 답이 없다. 하지만 잘하고 못하는 느낌은 분명히 있다. 그래서 디자인 교실의 수업은 좀 더 독특하게 이루어진다. 학생은 선생님이 내준 과제의 틀에서 자신이 무언가를 시도해본다. 선생님은 학생이 가져온 과제에 대한 어떤 느낌을 말하고, 학생은 이 피드백을 바탕으로 자신의 과제를 수정해 나간다. 이 피드백 루프를 반복하는 것이 전형적인 디자인 수업 방식이다. 어떻게 보면 이게 무슨 수업인가 싶겠지만, 이 과정을 통해 학생은 스스로 나름의 답을 찾아간다. 그 어떤 확신도 없이 이 과정을 2년 정도 거치면 그 학생은 어느새 프로 디자이너로서 성장해 디자인 비용을 받으며 디자인을 할 수 있게 된다.

디자인과 악기와 문학, 자전거 등 운동을 배우는 과정과 모두 유사하다. 모두 특정 무의식적 행동과 태도를 전문적으로 만들기 위한 연습과 훈련을 반복한다. 나의 행동에서 의식적인 태도를 무의식적 자동 반응으로 바꾸는 과정이랄까. 우리 사회는 이렇게 훈련된 고도화된 무의식을 존중하고 존경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자신의 성취를 인정받는다.



좀비에서 전문가로: 무의식에 대한 재해석

인간의 의식은 무의식 안에 갇혀 있다. 우리가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면서 이 지하철이 어떤 원리로 이동하는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아니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지하철이 목적지까지 알아서 잘 이동해줄 것이라고 믿으며 앉을 자리만을 찾고, 이동하면서 무엇을 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거나 꾸벅꾸벅 잔다.

우리 몸은 지하철과 비슷하다. 의식은 무의식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상태이다. 의식적으로 물을 먹고 싶어서 음료수로 이동하면서, 의식은 우리 몸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면서 나를 물로 데려가고 어떤 원리로 팔과 손이 움직여 물컵에 물을 담아 내 입술로 가져오는지 알 수 없다. 아니 관심도 없다. 오로지 의식은 목이 말라 물을 먹고 싶다는 욕망과 해소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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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디자이너로 디자인을 둘러싼 세상에 관심을 두며, 읽고 쓰기를 반복합니다. <역사는 디자인된다> <런던에서 온 윌리엄모리스> <좋은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졸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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