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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림보 마케터 Nov 03. 2023

공부벌레 오빠는 아직 백수

오빠와 나는 여느 자식들보다 착하게 자랐다. 억척스럽게 우리를 키우는 엄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오빠는 모르겠지만 난 그랬다. 엄마가 바빠 그 대신 쓰라고 놓아둔 안방 서랍 속 만 원짜리를 오빠와 나는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 엄마와 맞바꾼 돈이었기 때문이었다.



학창시절 엄마는 없었다


엄마는 늘 바빴다. 몸으로 일하는 엄마는 종일 가게에 있는 일이 허다했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왔을 때에는 이미 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 몸을 이끌고 꾸역꾸역 빨래도 설거지도 집 청소도 완벽하게 해냈던 엄마는 무척 예민하기도 했고 늘 아프기도 했다. 


나는 어렸지만 엄마의 손이 필요하지 않는 아이로 자랐었다. 일찍부터 머리도 혼자 묶고 다니고 심지어 내 옷도 내가 직접 손빨래 하기도 했었다. 


엄마는 늘 좋아했다. "우리 딸래미는 손이 안 가. 해줄 게 없어" 나는 그게 세상에서 가장 큰 칭찬 같이 느껴졌다. 


나의 학창시절은 대부분 오빠 혹은 집에 놀러온 오빠 친구들과 함께 했다. 무뚝뚝하고 냉정했지만 리더십이 있던 오빠에게는 늘 친구들이 따랐고 집에도 많이 찾아왔었다.


하지만 오빠 친구들은 자주 나와 놀아주곤 했다. 그때마다 오빠는 늘 혼자 방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다. 



공부벌레 오빠


오빠는 공부벌레였다. 눈에 보이는 건 척척 외워내곤 했던 오빠는 공부를 열심히 하기까지 했으니 성적도 단연 잘 나왔다. 


동네에서도 눈에 띄게 공부를 잘했던 오빠는 과학고등학교 진학을 목표로 밤낮없이 공부만 했다. 그때 엄마의 희망은 온통 오빠였다. 


엄마가 돈을 벌었지만 아빠의 벌이가 변변찮았기에 여전히 빠듯한 살림살이였다. 사실상 엄마 외벌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그런 집에서 아들이 엄청 공부를 잘했다. 엄마의 수익은 생활비를 제외하고 대부분 오빠에게 투입되었다. 예술적 기질이 남달랐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진로를 바꿨다.


엄마의 관심과 돈은 오빠에게 집중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우리집의 희망은 온통 오빠였다. 나는 늘 오빠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자랐던 거 같다. 



공부밖에 모르던 바보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밖에 몰랐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에게 사랑받는 길이었다. 가족들은 우리집에 대단한 뭔가가 나올 거라는 기대로 오빠에게 집중했다.


오빠가 공부할 때에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티비도 보지 않았고 심지어 시험기간이 겹칠 때조차도 오빠 그림 숙제를 해주곤 했다.


그 덕에 오빠 미술 실기 점수는 항상 최고점이었다. 정작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던 나는 진로를 포기했다. 모르지 않았다. 내 미술 공부까지 시켜줄 여력이 없다는 걸.


오빠 학원비로도 빠듯했다. 나까지 그 힘겨움을 더해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눈에 띄지 않는 얌전하고 착한 딸로 자랐다. 원하는 걸 말하지도 않았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공부만 잘하면 되나?


오빠에게 공부 외에는 없었다. 특정 분야에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냥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보면 그게 다라고 생각했다.


대학도 삼수를 했고 학교에 들어가서도 방황했다. 소위 말하는 SKY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다니면서도 고시 공부를 했다.


변호사가 되겠다는 희망을 품고 그냥 공부만 했다. 


성인이 되어 보니 똑똑한 사람이 너무 많더라.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 알았다.


기고 나는 사람들이 도처에 깔렸다는 걸. 공부를 못하더라도 다른 방향으로 능력 있는 사람은 너무 많았다. 하지만 오빠에겐 공부가 다였다.


몇 번의 변호사 시험에 낙방했다. 2017년 변호사시험이 폐지되기 전까지 오빠는 시험 공부에만 매진했다. 마지막까지 합격 소식을 들려주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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