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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림보 마케터 Nov 04. 2023

오빠는 직업을 가진 적 없다

사람이라는 게 단 한 번의 성공 경험만으로도 다음 계단을 오를 힘이 생긴다. 하지만 오빠는 단 한 번도 성공을 경험하지 못했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도 오빠는 여전히 고시생에 이어 다양한 시험들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사법고시의 늪에 빠지다


그렇다. 오빠는 내가 아는 한 단 한 번도 직업을 가진 적이 없다. 아르바이트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잘했던 오빠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공부만 했다. 친구도 사귀지 않고 그냥 도서관에 살았다.


당연히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잘 나왔다. 내 기억으로는 한두 번 정도를 제외하고는 장학금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장학금을 받긴 했지만 그만큼 엄마에게 따로 돈을 받았다.


나는 그런 오빠가 때때로 미웠다. 가뜩이나 나와 오빠 둘의 학비를 대느라 허리가 휘는데 장학금 받으면 그만큼 엄마 부담을 줄여주면 좋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때 나는 장학금을 받을 자신이 없었다. 대신 엄마가 일하는 교복점에서 방학 때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을 했다. 용돈이라도 벌어서 엄마를 덜 힘들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일하는 동안 오빠는 공부를 했지만 오빠는 그 돈을 자신의 통장에 쌓아두곤 했다.


그렇게 오빠는 늘 공부만 하는 아들로 자랐다. 공부만 했다면 공부를 쭉 하는 연구원이나 이런 쪽으로 진로를 정했으면 좋으련만. 오빠는 대학교 2학년이 되자 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렇게 사법고시만을 보며 20대를 보냈다. 아니 30대까지도 사법고시에 젊음을 바치고 있었다.



우리집의 희망, 이제는 짐


공부만 하던 사람이었다. 공부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2017년 사법고시가 폐지되기 전까지 오빠는 매일 도서관에 가는 거 말고 다른 걸 해본 적은 없었다.

우리 집의 희망이었던 오빠는 그렇게 엄마의 걱정이자 짐이 되었다. 우리는 오빠가 공부한다는 이유로 이십여 년 동안 티브이도 크게 틀어본 적이 없었다. 사실상 오빠 중고등학교 때부터 그래왔으니 내가 아는 한 식구들은 온통 오빠 눈치를 봤다.


오빠가 주말에 집에 있을 때에는 거실에서 가족들과 대화하는 것도 제한적이었다. 오빠가 피곤해서 잔다는 이유였다. 그 상태가 오빠 40대 되어서까지 반복되었다.


엄마에게 오빠는 여전히 대학생이었고 고시생이었고 챙겨줘야 할 어린아이였다. 오빠 문제로 엄마와 아빠의 다툼도 많았다.


오빠가 고시의 늪에 빠져 있는 동안 엄마는 병에 걸려 일을 관둬야 했고 그런 중에도 오빠를 향한 엄마의 희망은 포기할 줄 몰랐다.



엄마는 오빠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엄마의 자랑이었던 오빠가 마치 없는 자식이 되어버렸다. 공부 잘하는 아들 덕에 늘 어깨를 피고 다녔던 엄마는 이제 오빠 이야기가 나오면 숨고 싶다고 했다.


"너네 아들은 뭐해. 아직도 공부해? 그 정도면 이제 그만하게 해. 딸도 시집을 못 갔다며? 쯧쯧쯧"


어딜 가든 이런 소리를 듣는 엄마는 자식 이야기가 나오면 고개를 숙이곤 했으며, 모임에 나가는 것조차 싫어했다. 엄마 지인들 사이에서는 시집 못 간 나도 오빠와 함께 애물단지로 싸잡아 묶였다.


오빠가 내 부모도 자식도 아니지만 나는 오빠의 미래를 간절히 소망했다. 고시가 아니더라도 뭐든 제 몫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간절히 바랐다.


교회를 띄엄띄엄 나갈 때에도 나의 기도 목록에는 꼭 오빠가 있었다. 온 가족이 오빠의 미래를 소망했지만 오빠의 미래는 아득했다.


공부밖에 모르는 오빠의 삶에 대안은 늘 '공부'였다. 공부하는 거 말고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것이 오빠를 점점 갇히게 했다.



연이은 고시 낙방, 대안은 없었다


단 한 번도 합격하지 못한 오빠의 고시생활은 또 다른 시험을 택함으로써 방황이 시작되었다. 사법고시를 보면서 오빠는 행정고시로 눈을 돌렸다.


사법고시만 죽도록 해도 될까 말까인데, 행정고시까지? 그때는 이미 대학생부터 해왔던 사법고시 공부가 10년을 훌쩍 넘어갈 때였다. 이 정도면 그만둘 만도 하지만 오빠에게 대안은 없었다.


당연히 행정고시가 될 리 없었다. 고시 폐인이 되어버린 오빠는 공부도 죽도록 하지 못했다. 해봤자 늘 떨어지는 걸. 적당히 도서관을 다니고 집에 오면 게임을 하곤 했다.


살아야 하니까. 뭐라도 해소할 거리가 있어야 하니까. 그런 오빠를 보는 가족들의 한숨을 늘어만 갔다. 이때쯤 엄마와 아빠가 오빠 문제로 싸우는 일도 잦았다. 엄마는 종종 죽고 싶다고 말했다.


이때까지 오빠가 학원 가고 도서관에 가고 각종 보험과 휴대폰비를 내주는 건 부모님의 몫이었다. 40대 중반인 지금도 상황이 다르지는 않다.


암튼 오빠는 몇 번의 행정고시 낙방, 그리고 행정직 9급과 7급에도 도전하기에 이른다. 정말 평생 시험만 본 셈이다. 이 시험, 저 시험을 방황하는데 당연히 될 리 없다.


오빠는 자신을 내려놓지 못했다. "사법고시 보던 내가 9급을?" 그냥 적당히 체면치레로 9급을 본 것이니, 열심히 공부했을 리 없다. 당연히 어떤 시험에도 합격을 한 적은 없었다.


1차 합격이라도 할 때면 의기양양 하여 온 식구들을 더 노심초사하게 만들곤 했다. 2차 합격이 코앞에 있는양 그랬다. 하지만 1차를 합격한 적이 있긴 한지 우리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는 면역질환과 암이 발견되어 죽음을 오갔다. 오빠를 온전히 지원해 주던 엄마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오빠 또한 삶의 길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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