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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미 Nov 01. 2024

배려의 다른 말은 기다림

우리가 사는 빌라는 공동현관문 바로 앞에 주차장이 있어서 대개 공동현관문 앞에 남편을 먼저 내려준다. 흡연자인 남편이 미리 내려 공동현관문 옆 돌계단으로 내려가 종이담배 한 가치를 피우고 돌아오면 주차를 마친 나와 만나는 시간이 얼추 맞기 때문이다. 기껏해봐야 한 가치이고 담배 피우는 시간이 길지 않지만 그 시간조차 기다리기 싫어서 미리 내려주기 시작한게 내 속마음이다. 물론 남편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남편이 내릴 때가 되었다고 알려줄 뿐이다.



그날도 평소 남편을 내려주던 곳에 정차하였는데 남편은 내릴 생각이 없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담배를 챙기는가 싶었는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없는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오빠, 안 내릴거야?”

“너랑 같이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중이야.”



그 말에 내가 서둘러 시동을 끄고 가방을 챙기자 그제야 남편도 차문을 연다. 



“너가 내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



남편이 다정한 말투로 짧게 보충 설명을 한다. 내가 너무 꿈지럭 거렸나보다. 담배까지 피고 와도 내가 더 늦게 나와서 기다린 적이 많았던걸까. 인정한다. 난 굼뜬 사람은 아니지만 차에서 내리기 전에 덮고 있던 무릎담요를 정리하고 운전할 때 사용하던 텀블러를 챙기다보면 늦을 수 밖에 없으니.



내가 늦게 내린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남편은 그런 상황을 핀잔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별일 아닌 듯 말한 오늘이 처음이다. 그런 남편이 고마운 이유는 기다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인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맛집이어도 줄서야 하면 다른데로 가자고 할 정도인데 여지껏 묵묵히 나를 기다려온 것이다. 내릴 때 좀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면 안되겠느냐고 좋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조차도 말한 적 없는 남편이어서 더 고맙다.



몇 년 전 재촉하는 분위기를 풍기는 남편 때문에 서두르다 넘어져서 발목을 심하게 접지른 후 원망하듯 남편 탓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문에 조심스레 기다려주는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든 번번이 기다려도 생색 한 번 내지 않고 서두름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고마운 일이다.



게다가 나는 남편이 담배 피우는 그 짧은 시간을 기다리기 싫어 매번 미리 내려주지 않았던가. 



언젠가 인터넷에서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올린 감동적인 이야기를 떠오른다. 내용은 이랬다. 성인이지만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카페로 데리고 온 어머니는 아들에게 키오스트로 주문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며 직접 해보도록 연습 시켰다. 그런데 하필 점심시간이라 식사 후 커피 마시러 온 직장인들이 어머니와 아들 뒤에 줄줄이 기다리고, 마음이 급해진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주문을 멈추고 비켜서려고 하는 순간 어느 지혜로운 손님이 말을 걸었다고 한다. 



“아드님이 주문을 참 잘 하시는데요? 저희 것도 주문해주세요!”



순간 마법이 일어났다. 너도 나도 주문을 대신 부탁을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기다리던 손님들이 짜증낼까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아르바이트생은 훈훈한 모습에 눈물을 글썽였고 아직 세상은 아름답다는 마무리로 글은 끝났다. 장면을 상상하며 읽던 나도 한동안 훌쩍 거렸다. 



자칫 불편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지만 발달장애를 가진 분이 주문하는 느린 속도를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게 한 손님의 순발력은 놀랍다.  곤란한 상황에서 이런 재치를 발휘한다면 좋겠지만 누구나 이렇게 적극적이고 순발력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배려가 있다. 바로 기다림이다.



기다림이란 생색내지 않으면서 해줄 수 있는 배려다. ‘빨리빨리’라는 말이 옥스퍼드 사전에 ‘ppalli ppalli’라는 말로 등재될 정도로 조급한 문화에 사는 우리나라에선 누군가를 기다려주는 모습은 어쩌면 최고의 배려일 수 있다. 남편이 그랬든 지혜로운 손님이 그랬듯이 말이다.



나 역시 나도 모르는 배려를 받으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몸살이 나서 힘든 몸으로 마트에서 느릿느릿 장을 볼 때, 두 손 가득 짐을 든 채 가고 있을 때, 휴대폰 보며 걷느라 미처 주위를 살피지 못할 때 누군가는 조용히 나를 기다려주었던 건 아닐까.



카페 이야기 속 지혜로운 손님처럼 상황을 반전시키는 능력이 있어 주위 사람들을 감탄하게 하는 드라마 같은 장면을 꿈꾸지만 그런 건 욕심이란 걸 안다. 빨리빨리 문화에 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자꾸 마음이 급해질 때 앞사람이 부담을 갖지 않도록 기다려주는 것만이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도 안다.



나의 최선이 누군가에게 배려라는 이름으로 닿을 수 있다면 근사하지 않아도 충분히 기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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