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회 공인노무사 1차 시험 후기
- 1차 시험은 절대평가로 치뤄지며, 단일 과목 40점 미만 없이 전 과목 평균 60점 미만을 득점하면 합격한다. 최근 응시자의 1차 시험 탈락 비중은 50%를 약간 상회한다.
이것이 공인노무사 시험 입성을 고민하던 내게 주어진 몇 줄 정보였다. 처음 이 내용을 접했을 때만 해도 절대평가 속에서 떨어지는 절반의 지원자 어떤 사람인가 했는데, 그게 내가 될 예정이었다. 상대평가라면 열심히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허수지원자로서 석차나 표점을 올려주는 공익을 수행한다는 사명이라도 있었을텐데, 1차는 그저 각자가 각자의 싸움을 벌이는 시험이었다. 수험생이라기보다는 직장인의 아이덴티티가 더 큰 나로써는 귀한 휴가기간에 못 다 잔 잠을 더 채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원서를 취소하고 보전한 원서료로 닭이라도 한 마리 시키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시험 전날까지 고민했다. 환불 기간이 애저녁에 지난 관계로 3만원짜리 견학을 택했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모여든 노무사 준비생들의 카페 글을 조금 들여다보다 일찌감치 잠들었다. 많은 이들이 사활을 건 시험장에 견학을 가기로 했으니 시험장으로 향하는 길에 세워야 할 목표는 두 가지였다.
1) 다른 수험생에게 피해주지 않기
2) 시험 끝날 때까지 잘 앉아 있기
"아, 죄송한데 제 자리인 것 같아요."
다짐이 무색했다. 칠판의 지정좌석표를 보지 못한 죄로 제1목표, '다른 수험생에게 피해주지 않기' 달성이 초장부터 위협받았다. 너그러운 수험생께서는 초시 견학생 무지랭이의 엉거주춤한 사과를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에게 합격과 건승이 함께 하길 기원하며 다시 법전에 고개를 박았다. 1차 고사장에서 법전을 탐독하는(척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수험생은 아마도 나뿐인 것 같았다. 과반의 수험생이 4Days라고 적힌 얄쌍한 교재, 단정한 표로 프린트 된 정리자료, 손때묻은 오답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각선 자리에 앉은 한 수험생은 웃는 상에 자신만만한 눈매를 가진 면접프리패스상이었는데, 한쪽 눈의 실핏줄이 터진 채 500ml 페트병에 담긴 블랙 커피를 연신 비우며 너덜너덜해진 책을 넘겨보고 있었다. 전날 밤 노무사 준비생 카페에서 '전 네 시까지 보다가 눈 좀 붙이고 여섯 시에 일어나야할 것 같아요!'라고 태연자약하게 쓰인 글을 떠올렸다. 그에 비하면 나는 일곱 시간을 꽉 채운 숙면으로 머릿 속이 깨끗했는데 시험에 동원될 이론 지식마저 깨끗하게 비어버린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9시가 가까워 오자 125분간 15인의 수험생과 생사고락을 함께 할 두 명의 감독관이 고사장에 입실했다. 그 중에 경험이 많아보이는 베테랑 감독관이 다른 감독관에게 신분확인절차를 설명하는 동안, 수험생들의 책상 위로 스톱워치 기능이 구비된 타이머, 혹은 반대로 잡다한 기능이 다 빠진 손목시계가 척척 올라왔다. 몇몇 책상에는 계산기까지 동원되었다. 스마트폰이라는 단어조차 오래된 감이 있는 시대에 이토록 하나의 기능에 충실한 장비들이 등장하다니 생소하면서도 고마웠다. 그에 비하면 내 책상은 볼펜과 싸인펜, 수정테이프와 신분증 정도만 놓여 단촐했다. 나만큼이나 간소한 책상의 주인공들과 허공 속에서 시선을 마주하며 '혹시 당신도?'하고 묻고 싶었지만, 제1목표를 해칠까봐 발화하지는 않았다.
베테랑 감독관의 설명을 듣던 다른 감독관이 수험생들을 집중시키고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신분증 대조와 OMR 카드의 인적사항 작성, 그리고 시험지 배부를 거친 뒤, 타종소리와 함께 시험을 시작했다. A4 사이즈의 책자 형태로 깔끔하게 제본된 시험지에는 과목당 25문항씩 다섯 과목, 총 125문항이 꼼꼼하게 채워져 있었다. 1분당 1문제라는 산술적으로 촉박하게 느껴지는 가늠과 달리 그 지문이나 보기가 길지 않아 한 치의 숙고를 허락하지 않는 스피드 퀴즈같은 시험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다만 속도와 관계없이 모르면 틀려야 하는 문제들 틈새로 용어 하나, 숫자 하나 어그러뜨려놓고 수험생의 실수를 기다리는 함정들도 눈에 띄었다. 시험의 이런 성질 덕분이었을까. 시험 종료까지 20분을 남겨놓은 시점에 베테랑이라 믿었던 감독관이 "10분 남았습니다."라고 단호하게 외쳤다가 다른 감독관이 헐레벌떡 수습하는 헤프닝에도 불구하고, 시험이 끝날 즈음엔 모두가 펜을 놓고 가지런히 무릎 위에 손을 올린 상태였다.
자비로운 한국산업인력공단은 합격자 발표일까지 불안할 수험생들을 위해 채점에 필요한 OMR카드만 쏙 가져가고 시험지는 각자의 자리에 남겨두었다. 이로써 나의 초시 같지 않은 초시는 제2목표를 달성한 채 끝이 났다. 신림행 버스를 가득 메우는 수험생들과는 다른 버스에 올라 여느 때와 같은 주말처럼 친구와의 점심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방 속에는 과락이 확정된 시험지가 함께였다. 예정된 파국을 맞이한 시험이었으나, 응시료를 치킨값으로 날리지 않은 것은 잘된 일이었다. 게시판을 장식하는 직장인 수험생의 성공담이나 아이를 키우며 형설지공으로 노무사가 된 육아 수험생의 합격 수기는 적어도 내게 해당 사항이 없겠다는 실감을 얻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