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화백을 그리며
저희 집 거실 한켠, 오후 햇살이 살며시 스며드는 벽면에는 김환기 화백의 《여인들과 항아리》 영인본이 단정하게 걸려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전시에서 운 좋게 구해 정성껏 표구한 뒤로는, 어느덧 저희 집 거실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라는 화려한 수식어보다, 화백께서 제가 살고 있는 이 성북동에서 인생의 한순간을 보내셨다는 사실에 저는 더욱 마음이 끌립니다. 지금 제가 천천히 걷는 이 굽이진 골목길을, 그분도 언젠가 같은 마음으로 걸으셨을 거라는 생각에 문득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시간이 켜켜이 쌓인 이 동네 어딘가에, 그분의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을 것만 같습니다.
바다에서 온 푸른빛
1913년, 전남 신안군 안도라는 작은 섬. 사방이 온통 바다인 그곳에서 소년 김환기는 매일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자랐습니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그 경계선은, 평생토록 그의 눈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 풍경은 ‘환기 블루’라 불리는 고유한 빛이 되어 화폭 위에서 다시 숨을 쉬게 되었습니다.
그 푸른빛은 단순한 색채가 아니었습니다. 고향의 바다였고, 어머니의 따스한 품이었으며, 이국땅 좁은 창가에 혼자 앉아 조용히 떠올렸을 조국의 하늘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매화와 항아리, 새와 나무 같은 소재들을 즐겨 그리신 것도,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화폭 위로 번져 나온 흔적이 아니었을까요. 작은 형상 하나에도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타향에서 피워낸 꽃
김환기의 예술 여정은 일본 도쿄에서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뗐습니다. 서양화를 배우며 근대적 기법을 익혔지만, 그는 늘 그 너머를 응시했습니다. 서구의 기법을 받아들이되, 그 위에 우리의 정신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1950년대 파리의 세느강변을 거쳐, 1963년 마침내 뉴욕이라는 거대한 도시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로커펠러 재단의 초청으로 머물게 된 그곳에서, 그는 매일같이 화면을 가득 메우는 수많은 점들을 찍으며 자신만의 언어를 완성해 나갔습니다.
처음 그 점화를 마주한 사람들은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작은 점들 안에는 타국에서 느끼는 고독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 그리고 깊은 사색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젯소 대신 명반을 바르고, 묽게 푼 유화 물감을 동양의 붓으로 찍어 번지게 하는 방식으로, 그는 동양의 여백과 서양의 추상을 조용히 만나게 했습니다.
하나의 점이 품은 우주
2019년, 김환기의 《우주》가 132억 원에 낙찰되며 한국 미술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지금도 가장 비싼 그림들 중 여러 점이 그의 작품이라니, 그가 남긴 예술의 무게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숫자보다 더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다 문득 느껴지는 화가의 마음입니다. 뉴욕의 좁은 작업실, 차가운 바닥에 혼자 앉아 점을 찍어나가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 그 점 하나하나가 간절한 기도처럼 느껴집니다. 말을 아끼고 진심을 담는 방식으로, 그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내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환기와 시인 김광섭. 두 분은 성북동에서 이웃하며 서로의 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아꼈습니다. 1970년, 뉴욕에 머물던 김환기는 김광섭의 부고를 잘못 전해 듣고 깊은 슬픔에 빠진 채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제목으로 붙인 그 작품은, 친구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진혼곡이었습니다. 훗날 이 시가 노래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모습을 본 김광섭은 “기적 같다”고 말했습니다.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다시 노래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일. 그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의 순환인지요.
곁을 지킨 사랑, 김향안
김환기의 곁에는 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내 김향안 여사. 시인 이상의 전 부인이기도 했던 그녀는, 남편의 아호를 따라 ‘향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며 그의 삶과 예술을 묵묵히 지켜냈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내조자가 아니었습니다. 생계를 책임지고, 전시를 준비하고, 때로는 혼자 낯선 외국으로 건너가 모든 일정을 챙겼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겪는 예술가로서의 고독과 긴장을 말없이 함께 견뎠습니다.
김환기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녀는 환기재단을 세우고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열어 남편의 예술을 이어갔습니다.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온 우주가 텅 빈 것 같다”는 그녀의 한마디에, 반평생을 함께한 사랑의 깊이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도 그림 앞에서
오늘도 저는 거실 한편에 앉아 《여인들과 항아리》를 바라봅니다. 그림 속 푸른 항아리와 단정한 여인들, 그리고 화면에 조용히 번진 색감들이 마치 따스한 손길처럼 마음을 어루만집니다.
김환기의 그림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시간과 정서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그림 앞에 서면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지고, 좀 더 정성스럽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듭니다. 성북동 골목을 걸을 때면 문득 그분의 뒷모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라는 수식어 너머, 한 예술가의 순수한 혼과 그림이 전하는 조용한 위안이 지금 이 순간에도 제 마음 한구석에 은은하게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온기는, 오늘도 제 하루를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