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레드시트와 달항아리 사이
형님과 누나가 제게 종종 건네는 말이 있습니다.
“니는 부자집에서 태어났으면 진짜 행복하게 한량으로 살았을 낀데."
그 말이 어찌나 정확한지, 단 한 번도 섭섭하게 느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역시 혈육의 눈은 속일 수 없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되돌아보면, 그보다 더 정확한 평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타고난 한량 체질입니다.
저는 아름답고 한가한 것들을 좋아합니다.
음악, 미술, 사진, 산책, 그리고 시간이 켜켜이 쌓인 근사한 오브제들 말이지요. 그런 제 마음을 누군가 대신 말해준 장면이 있었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김희성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었습니다
“난 원체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그런 것들.”
그 순간, 마치 제가 드라마 속에 들어가 직접 그 대사를 읊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용하고 아름다운 것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저에게는 너무도 소중하여 따로 챙겨 아껴주고 싶은 것들입니다.
지금도 아내와 어디론가 나설 때면, 목적지를 찾기보다 하늘에 피어난 구름이나 골목 어귀의 오래된 나무에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입니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조금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곤 하지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성과보다는 정취가, 목적보다는 과정이 더 소중한 것이 저의 본성인 것을요.
얼마 전, 달빛이 유난히 고왔던 어느 밤이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달이 이렇게 곱게 떴는데, 우리 달 보면서 예쁜 잔에 술 한잔 할까요?”
돌아온 건 “어이구, 여보 또 시작이예요?” 하는 핀잔과 ‘철 좀 들라’는 무언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달이 저렇게 예쁘게 떴는데,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뭐가 문제지? 달? 술? 아니면 예쁜 잔?’
2년 전, 감사하게도 회사의 지원을 받아 MBA 과정을 밟게 되었습니다.
업계에서는 꽤 명망 있는 학교였고, 교수님들과 동기들도 모두 훌륭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공 수업보다 그 학교의 웅장한 도서관에 더욱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수업은 성실히 들었지만, 틈만 나면 도서관으로 달려가 책장을 넘기곤 했습니다. 전공 서적 틈에서 흥미롭고 아름다운 책을 발견하면, 보물을 찾은 듯 가슴이 뛰었고, 예술 서적 코너에서 오후 내내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동기들이 인적 네트워크를 다질 때, 저는 열심히 책과 네트워킹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사람들은 요즘 로또에 당첨되어도 계속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덜 먹고, 조금 덜 쓰더라도 경치 좋고 바람 선선한 곳에 내려가 구름 흐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꿈꿉니다. 물론 저도 제가 비현실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행복해지는 걸 보면, 이 또한 한량 체질의 특권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그 기질은 더욱 뚜렷해집니다. 남들이 반나절이면 모두 둘러보는 전시를, 저는 달항아리 하나 앞에서만 한나절을 보내기도 합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더없이 완벽한 자태. 소박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그 품격 앞에서, 시간조차 멈추는 듯합니다.
그런 저도 분명한 가장입니다.
아이들은 어느새 대학생과 고등학생이 되었고, 큰아이 등록금, 작은아이 학원비, 생활비까지 줄줄이 따라옵니다. 계산기를 두드리다 보면,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옵니다. 아무리 한량 체질이라 해도, 현실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 취향대로 무용한 것들만 사랑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실용적이고 생산적인, 수입이 되는 유용한 일을 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사무실에 앉아 있습니다. 스프레드시트를 붙잡고, 회의에서 '시너지'와 '윈-윈'을 외치며, 분기 목표 달성을 위해 직을 겁니다.
그런 저에게 주말의 고궁 산책과 박물관 관람은 유일한 위안입니다.
동료들과 지인들은 그런 저를 보며, “실장님은 여유로워 보여서 부러워요.” 라고 말합니다.
여유가 아니라 체질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저 웃으며 넘깁니다. 체질을 설명하기에는 회사에서의 시간은 너무 짧고, 제 목구멍은 포도청이며, 팍팍한 생활은 분명한 현실이니까요. 아이들이 모두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지금처럼 살아야 합니다. 한량의 낭만은 가슴에 묻고 현실과 타협하며, 가끔씩만 달을 올려다보고, 가끔씩만 구름에 넋을 잃고, 가끔씩만 달항아리 앞에서 시간을 잊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 언젠가 마음껏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꿉니다. 그때가 오면, 저는 주저 없이 외칠 것입니다. “저는, 체질이 한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