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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어긋난 내가 사랑한 영화들

특별해서 더 매력적인, 저만의 보물 세 편

by papamoon

누구에게나 '나만의 숨겨둔 보석 같은 영화'가 하나쯤은 있을 것입니다. 크게 흥행하지 못했을지라도, 제 마음속에선 여전히 조용히 상영 중인 영화들이 있습니다. 그 영화들은 때론 친구처럼 저를 이해해 주고, 아무 말 없이도 제 속마음을 알아채는 것만 같습니다. 저에겐 그런 영화가 세 편 있습니다. 이해준 감독의 《김씨표류기》(2009),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2004),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입니다. 세상은 이 영화들을 '이상하다', '낯설다'라고 말했지만, 저는 그 낯섦이 좋았습니다. 그 엉뚱한 세계가 묘하게 저와 닮아 있었고, 그래서 더 애틋하게 느껴졌습니다. 평범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좋았던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세상에서 조금 비켜선 사람들

이 세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사회의 중심에서 조금씩 벗어난 사람들입니다. 《김씨표류기》의 김 씨는 자살 시도 끝에 밤섬에 홀로 표류하지만 그곳을 자신만의 낙원으로 가꿔갑니다.《아는 여자》의 동치성은 시한부 오진을 계기로 짧고도 찬란한 사랑을 만납니다.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는 외계인의 침공을 믿고 제약회사 사장을 납치해 진실을 캐내려 합니다. 조금 비틀린 채 세상을 바라보지만, 그래서 더 솔직하고 자유로우며, 어딘가 순수해 보입니다.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인간적인 얼굴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멈춤의 순간에 피어난 세계

세 주인공 모두 '삶의 큰 쉼표'를 마주합니다. 김 씨는 회사도 잃고 연인도 떠났으며, 동치성은 한때 잘 나가던 투수였지만 이제는 2군을 전전하고, 병구는 모두가 '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들은 이들의 멈춤을 '종착역'이 아닌 '출발점'으로 그리는 것 같습니다. 김 씨는 고립 속에서 삶의 리듬을 되찾고, 모래사장의 'HELP'는 언젠가 'HELLO'로 바뀝니다. 동치성은 시한부라는 오해 속에서 오히려 진짜 사랑을 만납니다. 병구는 누구도 이해하지 않는 신념 속에서 혼자만의 우주를 지켜냅니다. 변화는 때로 외롭고 두려운 것이지만, 이 영화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것 같습니다. 삶이 한 번쯤 멈추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것을요.


고립의 끝에서 만난 연결

이 영화들에는 ‘고립’과 ‘연결’ 사이의 미묘한 진동이 흐릅니다. 인물들은 철저히 혼자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와 연결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김씨표류기》의 김씨는 망원경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어 안간힘을 씁니다. 병 속 편지와 작은 응답들—말보다 깊게 이어진 그 교감이, 조용히 서로의 세계를 움직입니다. 《아는 여자》의 동치성은 늘 곁에 있었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사랑을 마주하고,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에게도 결국 끝까지 곁에 남은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순이 말입니다. 그 연결은 서툴고 기묘하지만, 그래서 더 진심처럼 다가옵니다. 주류의 언어로는 닿지 않는 감정들이 이 영화들 속에서는 고요히, 그리고 정확히 마음을 두드립니다.


웃다가 뭉클해지는 순간들

이 영화들이 유독 오래 남는 이유는 유머 때문인 것 같습니다. 웃음을 터뜨리게 하면서도, 그 웃음 끝에 살짝 울컥하게 만들거든요.《김씨표류기》에서 김 씨는 새똥 속 씨앗을 발견하고, 한도 초과된 신용카드로 똥을 긁으며 말합니다. "오랜만에 카드 한 번 신나게 긁어보네." 그 씨앗에서 옥수수가 자라고, 마침내 그는 자장면을 완성합니다. 농담 같은 여정이 한 그릇의 위로가 되는 순간—절망과 창의, 슬픔과 유머가 한데 뒤엉킨 그 장면은 이상하게도 뭉클합니다.

《아는 여자》에서 이연은 장난스럽게 묻습니다. "땅볼을 잡아서 1루로 안 던지고 관중석으로 던져버리면?" 치성은 "안 돼요"라고 답하죠. 하지만 영화 후반, 9회 말 마지막 아웃카운트에서 치성은 이연을 위해 있는 힘껏 공을 관중석으로 던져버립니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지구를 지켜라》는 더 어두운 유머를 품고 있습니다. (영화의 포스터랑은 다르게 잔인한 장면들이 난무하는 고어 영화입니다. 우울하실 때는 보시지 않기를 권합니다.) 병구의 편집증적 확신은 처음엔 웃음거리로 보이지만, 기이하게도 점점 설득력을 얻어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는 황당무계한 반전을 꺼내놓습니다. 병구의 모든 믿음이 사실이었다는 것을요. 코믹하게 웃어넘기던 관객들은 어느새 불편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기준은 누가 만드는 걸까요?


골목길을 걷는 영화들

이 영화들은 대중적인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을지 모릅니다. 명확한 장르도 없고, 시원한 결말도 없으며, 소비되기 좋은 캐릭터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믿어봅니다. 이 영화들이 더 오래 살아남을 거라고요. 속도와 자극이 앞서는 시대에, 이 영화들은 골목길을 걷는 것 같습니다. 가끔 멈춰 서서 낡은 간판을 바라보고, 오래된 풍경을 찬찬히 쓰다듬습니다. 빨리 스쳐가면 보이지 않는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주워 담습니다.


영화가 저를 먼저 알아본 순간

이 영화들은 때때로 저보다 먼저 저를 알아본 것 같습니다. 《김씨표류기》의 김 씨처럼 저도 누군가의 망원경 너머에서 오래 기다린 적이 있고, 《아는 여자》의 동치성처럼 뜻밖의 순간 마음이 열리던 날들이 있었으며,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처럼 외롭더라도 끝까지 지키고 싶은 저만의 우주가 있었습니다. 세상은 그걸 몰랐지만, 영화는 먼저 알아채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화는 저에게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조용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 세 영화는 박스오피스에서는 아쉬웠을지 몰라도, 제 마음속 상영관에서는 언제나 상영 중입니다. 조금 낯설고, 조금 이상하고,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저만의 영화들입니다. 언젠가 문득 다시 보고 싶어질 때, 어쩐지 위로가 필요한 밤에, 저는 다시 이 영화들을 꺼낼 것입니다. 비록 특별한 취향일지 모르지만, 그게 바로 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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