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십 대를 영원히 추억할 빛나는 세 개의 무대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한국의 대중문화가 눈부시게 개화하는 순간을 온몸으로 마주했으니까요. 그전에는 일본과 홍콩, 그리고 미국의 문화가 마냥 부러웠습니다. MTV 화면 속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일본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돌려보며 “우와! 근사하다” 하고 속으로 감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기가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음악과 영화, 패션이 그들 못지않게—아니, 어쩌면 더 세련되고 당당하게—빛나기 시작한 겁니다. 서태지가 〈난 알아요〉로 무대를 뒤흔들고, H.O.T. 가 〈캔디〉로 전국의 여중생을 울리던 그 시절. 그 찬란한 물결의 한가운데서 저는 십 대를 보냈습니다.
그 시절의 공기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심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DJ의 낮고 다정한 목소리, 버스 창밖을 스치던 도시의 네온사인, 학교 앞 레코드샵에서 산 카세트테이프의 비닐을 벗길 때 손끝에 전해지던 바삭한 촉감과 소리. 아직 여물지 않은 마음속에, 그 모든 순간들이 깊게 스며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기의 중심에서, 제 십 대를 아름답게 추억하게 하는 세 개의 무대가 있습니다.
가을 강변 위, 내일을 걱정하지 않던 토요일밤의 시네마틱 한 순간.
고3의 작은 일탈의 밤, 보랏빛 조명 아래 속삭이듯 번져와 마음속에 각인된 노래.
그리고 88년 크리스마스이브, 전주의 몇 마디로 경기장을 집어삼킨 젊음의 응원가.
그 장면들은 지금도 제 안에서 생생히 숨 쉬고 있습니다.
첫 번째 기억 — 가을 강변 위의 시네마틱 선율
제가 막 사춘기에 접어들던 1991년 가을,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한강 특설무대.
무슨 순정만화나 홍콩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외모의 가수가 TV에 등장했습니다. 서른 살의 임재범이었습니다. 대충 걸친 듯한 검은 셔츠는 단추를 두세 개쯤 풀었고, 허리춤에 키가 달린 청바지를 입었습니다. 꾸밈없는 차림이었지만, 그 안에는 90년대가 빚어낸 여유와 낭만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습니다.
세피아빛 조명이 강물 위로 길게 번지고, 상쾌한 강바람이 그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흔들었습니다. 마이크 앞에 선 그가 첫 소절을 내뱉는 순간, 무대를 감싸던 공기는 달라졌습니다. 뜨겁고도 깊은 목소리가 강변을 가득 채웠고, 그 속엔 청춘의 낭만과 자유가 온전히 담겨 있었습니다. 시티팝 풍의 리듬이 강 위를 스칠 때, 도시의 불빛은 그 리듬에 맞춰 잔물결처럼 반짝였습니다.
그 무대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그 시대의 여유와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라는 확신을 품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내일 걱정이 없는 토요일밤, 모든 것이 가볍고 빛나 보이던 청춘의 한 장면.
아마도 그날 저는 커서 어른이 되면 서울로 가야겠다고 다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기억 — 보랏빛 조명 아래의 속삭임
이소라의 프로포즈 첫 방송, 1996년 10월 19일. 그때 저는 고3이었습니다.
토요일 밤 11시 50분에 시작하는 심야 음악 프로그램을, 다음 달 수능을 앞둔 고3이 온전히 시청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그날, 저는 무엇에 홀린 듯—부모님 몰래 숨어서—그 방송을 끝까지 시청하였습니다. 방 안의 불을 모두 끄고 TV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니, 화면 속 스튜디오는 보랏빛 조명 속에서 고요히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클로징 무렵,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 지금 무얼 하고 계세요?
제가 없는 가을은 쓸쓸하지 않나요?
슬프지 않나요?
전에 제가 달리는 차 속에서 당신께 불러드린 노래 기억하나요?
너무 바삐 이별하느라 못한 말이 있어요.
… 사랑해요.
일산에서 이소라.
제가 쓴 거예요.”
그리고 이어진 노래,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그녀의 깊고 떨리는 음색이 한음 한음 내려앉을 때마다, 마치 보라색 벨벳 상자 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콘트라베이스가 조심스럽게 깨어나 활 끝으로 현을 켜는 듯하였습니다. 음 하나하나가 부드럽게, 그러나 또렷하게 공기를 울렸습니다. 그날 밤은 저에게 작은 일탈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답게 기억됩니다.
그 보랏빛 무대와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까지도 제 기억 속에서 손톱달처럼 고요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세 번째 기억 — 크리스마스이브, 체조경기장에 울린 함성
1988년 12월 24일, 올림픽 체조경기장. 그날의 무대를 저는 TV 본방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처음 보게 되었죠. 하지만 그 순간의 전율은, 시간이 흘러도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하필이면 올림픽의 해, 하필이면 크리스마스이브, 하필이면 대학가요제 마지막 순서—모든 것이 극적으로 맞아떨어진 운명 같은 무대였습니다. 15개 팀이 무대를 마친 뒤, 마지막 순서로 무한궤도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전주가 시작되는 순간—첫 소절이 울리자, 그 넓은 공간이 하나의 심장처럼 뛰기 시작했습니다. 심사위원석에는 숨죽인 미소가 번졌고, 조용필조차 “대상감”을 직감했다고 합니다. 〈그대에게〉는 이전 무대와는 결이 달랐습니다. 프로그레시브 록의 웅장함, 세련된 신디사이저 사운드, 젊은 뮤지션들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한데 어우러졌습니다. 신해철의 목소리는 날카로움과 온기를 동시에 품으며 관객들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함성은 천장을 뚫고 하늘로 솟구쳤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우승의 환호가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여전히 현재형인 시간
이 세 무대는 제가 90년대를 추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빛나는 장면들입니다.
임재범의 한강 특설 무대에서 느낀 뜨겁고 자유로운 낭만,
이소라의 보랏빛 무대에서 전해진 깊고 섬세한 떨림,
무한궤도의 체조경기장에서 폭발한 젊음의 심장박동.
그 시절의 온도와 빛, 그리고 공기의 향기까지 간직한 이 기억들은, 지금도 제 삶을 은은하게 비춥니다. 문득 그때를 떠올리면, 저는 시간여행자처럼 다시 그 무대 앞에 서 있습니다.
90년대는 제게 단순한 과거가 아닙니다.
평생 간직할 보물이자,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꺼내어 힘을 주는 작은 등불입니다.
그리고 그 등불 속에서, 무대 위의 목소리들이 조용히 속삭입니다.
“그때 우리, 진짜 행복하지 않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