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가미 히로미치 전 이사장 강연(1)
'“주민이 주인이다” 일본 정촌에서 배우는 자치의 힘' 기사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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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식량자급률은 고작 37%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낮은 자급률 속에서 식량을 해외에 의존하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전 세계적으로 기아 인구는 7억만 명이 넘는데, 이 중 매년 수백만 명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식량이 부족한 이 시대에, 과연 지금의 수입 의존 체계가 지속 가능한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동경다마자치체문제연구소 이케가미 히로미치 전 이사장은 일본 지방자치의 역사를 설명하기에 앞서 ‘식량자급률’ 문제를 언급하며 강연의 문을 열었다. 그는 식량뿐 아니라 옷과 생활용품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모든 것이 지역 내에서 얼마나 자립적으로 생산되고 있는지를 짚어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민주주의 사회를 만드는 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의류 자급률은 1.5%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대부분은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지요. ‘그게 저개발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 자본이 해외에 공장을 세우고, 현지의 저임금 노동자를 착취해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입니다. 결국 일본 섬유산업과 대기업 이윤을 위한 것이지, 해당 국가나 노동자의 삶에 기여하는 방식이 아닌 겁니다.”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이러한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어떤 방향을 택할지 진지한 논의와 대안을 마련하는 게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서 ‘자립 가능한 삶의 구조’를 강조한 그는 이를 뒷받침할 사례로 일본 정촌의 변화를 본격적으로 짚어갔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1880년대까지만 해도 정(町)과 촌(村)이 7만 개가 넘는 자치단체로 존재했다(1888년 기준 7만1천314개). 정과 촌은 우리 읍면에 해당하는 규모로, 정촌 대표자를 정촌 주민들이 직접 선출할 정도로 실제 자치가 가능한 기초지방자치단체다.
그러나 시정촌제가 시행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1889년 시(市)가 신설되고 정촌 수는 한꺼번에 1만5천820개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시는 꾸준히 증가하고 정촌은 계속 줄어들면서 2025년 기준 시는 790개, 정 745개, 촌 183개 등 전체 자치단체는 1천718개로 감소했다. 이는 일본 근대 자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정촌이 급격히 사라지고, 시 중심으로 행정체계가 재편된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888~89년의 대규모 정촌 통합과 비교해도, 최근 감소 폭은 매우 큽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가 발생했죠. 이는 비단 일본만의 일이 아닙니다. 한국 역시 같은 흐름을 겪고 있지요.”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농촌 정촌의 존속과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는 단순히 정촌 수의 변화에 국한하지 않는다. 정촌이라는 삶의 단위가 사라지는 것이 공동체와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한일 양국이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다고도 진단했다.
강연 서두에 언급한 식량자급률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2005년 200만 명이 넘던 농업인구가 현재는 그 60% 수준인 130만 명까지 급감했다.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이 수치를 소개하며, 정촌의 존속 여부가 곧 지역과 지역 공동체의 자립, 나아가 모두의 미래에 직결된 사안임을 강조했다. “지역에서 먹고 입고 사는 것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게 되는 순간, 민주주의의 근간도 함께 무너진다”는 것이다.
정촌이 사라진 자리,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는가
정촌 수가 급감하고 시 중심 행정체계로 재편되어온 일본의 흐름은, 단순히 정부의 일방적 주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법률 개정과 정책 추진, 그에 대한 국민적 반응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특히 1999년의 지방자치법 개정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는다. 개정에 앞서 5년 간의 논의가 이어졌고, 정부가 지방을 통제하던 많은 조항이 삭제되면서 법률적으로는 진일보한 개혁으로 평가받기도 했던 지방자치법 개정. 그러나 실제로는 정촌 수가 대폭 줄어드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시 법 개정 논의에 참여한 5명의 전문가 중 한 명이었던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주권자인 주민의 충분한 이해와 의견 수렴이 부족했다”고 그 원인을 짚었다.
“지방자치법 개정 과정에서 주권자인 주민들이 이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의견을 낼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여 전문가 5명 중 4명이 개정안에 반대한 것이지요. 법률 전반에 진보적 측면도 분명 있었지만 절차적 숙의가 부족한 상태였던 거죠. 그 결과 시정촌 합병이 다시 강하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내각은 지방자치법이 개정된 1999년, 3천229개의 시정촌을 1천 개까지 줄인다는 방침을 동시에 세웠다.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전국에서는 반발이 이어졌다. NHK에서 공개 토론을 생중계할 정도로 사회적 관심도 높았다. 이후 각지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인 학습회와 토론회를 조직하며 대응에 나섰다. 당시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600여 개 자치단체를 순회하며 강연을 열 정도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정부 정책에 무조건 따르기보다 자치단체 간 토론과 숙의를 통해 대응하려는 흐름이 형성됐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강행한 정책이었지만, 전국적으로 토론이 확산되고 학습회가 자발적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소개한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한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흐름이 있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책이 위에서 일방적으로 주어졌을 때도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한국도 다양한 움직임이 있을 텐데, 정부 방침을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주민들이 주권자로서 충분히 학습하고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흐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현대 일본을 지탱한 풀뿌리 저항
일본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주민운동 사례를 네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는 순서도 이어졌다. 메이지 시기에는 징병제와 납세제도 반대 운동을 비롯해 입헌주의·공선제 도입 요구, 국회 개시 요구, 지방자치체 확립 요구 운동이 진행됐다. 이 시기 여성 참정권 운동도 이미 태동하고 있었다.
다이쇼 시기엔 노동조합 운동과 농민운동이 본격화됐고 쇼와 시기를 거치며 노동조합 재건 및 파업운동이 고양됐다. 특히 농민운동을 통해 소작제도 폐지라는 실질적 성과가 나타났다. 이러한 주민운동은 이후 환경운동, 지방자치 민주화 운동, 평화운동 등으로 확산된다. 메이지유신 이후 천황제가 지속되는 동안 중앙에서는 조선 침략을 비롯한 제국주의적 흐름이 이어져왔지만, 이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풀뿌리 주민 운동 역시 꾸준히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군사비 지출 통계를 제시하며, 전쟁을 중심에 둔 국가 권력이 예산의 절반 이상을 군비에 투입한 역사적 흐름도 짚었다. 특히 1938년부터 일본이 패전하는 1945년까지는 국가 예산의 70% 이상이 군사비로 쓰였는데, 그는 “이런 역사 앞에서 단지 분노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목숨 걸고 싸운 활동가들의 존재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 내 군국주의 흐름은 멈추지 않고 있는 현실. 그는 이 같은 역사적 반복이 “국민이 ‘주민’으로서의 주권 의식을 갖지 못하고, 역사로부터 배울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지적했다.
“자치란 가장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역사적 맥락을 되짚으며 “지방자치는 국가가 부여하는 것이 아닌, 본래 지역사회가 지닌 자연권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3만 년 전 구석기 시대에는 국가라는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지역마다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려는 자생적 노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지방자치의 원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방자치는 자연의 흐름 속에서 생겨난 것이고, 사람은 자연에 반응하며 먹고, 입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런 삶의 방식 그 자체가 지방자치이며, 우리가 원래부터 갖고 있는 권리이기도 합니다.”
그에 따르면 ‘자연권으로서의 지방자치’는 인간이 모여 공동체를 꾸려온 아주 오랜 역사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국가가 개별 시민 모두를 돌볼 수 없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와 참여를 통해 지역사회가 형성되고, 이를 토론과 숙의를 통해 함께 설계해가는 과정이 진정한 지방자치라는 것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그는 한국사회에 깊은 기대를 전하기도 했다.
“지금 한국도 어려운 시기라고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런 시기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처럼 지역사회를 바꾸고자 애쓴 이들이 존재했기에 변화가 가능했지요. 중요한 건, 지방자치가 본래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권’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월간 옥이네 94호
글 박누리
사진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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