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가미 히로미치 전 이사장 강연(2)
'“주민이 주인이다” 일본 정촌에서 배우는 자치의 힘' 기사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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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강연에서 이케가미 히로미치 전 이사장은 일본 헌법과 지방자치법에 명시된 자치의 구조와 원칙을 짚고, 농촌 정촌 단위에서 실현되고 있는 자치 사례를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그의 설명은 자치가 단지 행정의 하위 구조가 아니라, 주민이 주체가 되는 공동체 설계의 핵심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헌법에 명시된 ‘자치의 권리’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일본의 자치 구조를 이해하려면, 먼저 헌법 조항부터 짚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일본 헌법은 ‘지방자치’에 관한 내용을 별도의 장(章)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제8장 지방자치).
92조 지방자치의 원칙 지방자치체의 조직과 운영은 지방자치의 본래 취지(주민자치·단체자치)에 기초하여 법률로 정한다.
93조 지방자치체의 기관과 주민 선거 지방자치체에는 법률에 정한 바에 따라 의회·행정기관·필요한 기관을 두고, 의원·단체장·법정기관직원은 주민의 직접선거로 선출한다.
94조 지방자치체의 권리능력과 조례 제정권 지방자치체에는 재정처리·재산소유의 권리(재정권)와 사무처리의 권리(행정권), 조례제정의 권리(입법권)가 있다.
헌법 제92조는 지방자치의 핵심으로 ‘주민자치’와 ‘단체자치’라는 두 축을 명시하고 있다. 주민자치는 주권자인 주민이 스스로 지역을 운영한다는 관점이고, 단체자치는 지역이 중앙정부와 대등한 주체로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이 두 가지 모두를 ‘자치'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93조는 지방의회와 단체장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할 수 있도록 보장하며, 자치단체가 필요에 따라 기관을 구성하고 운영할 수 있는 자율권을 부여한다. 해당 기관의 장이나 직원 역시 직접 선출할 수 있다. 제94조는 지방자치단체가 입법·행정·재정에 있어 독립적인 권한을 가진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독립적 자치 권한이 없는 우리 읍면 현실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 조항에서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법률에 정한 바에 따라’라는 표현을 단순히 국가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오해해선 안 된다”고 부연했다. 이 문구는 헌법 14조의 ‘법 앞의 평등’ 조항과 연결되며, 모든 개인과 자치단체가 법률에 근거해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제95조다. 국가가 특정 지방자치단체에 적용되는 법률을 제정할 경우, 해당 지역 주민의 과반수 찬성을 얻지 못하면 법 자체가 무효화된다는 내용이다.
95조 지방자치특별법의 주민투표(국가와 지방자치에의 대등 원칙) 국회는 특정 지방자치단체에만 적용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지만, 그 법률이 대상으로 하는 지방자치체의 주민투표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국회는 그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국회가 아무리 법을 만들어도, 해당 지역 주민이 동의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습니다. 최종 결정은 지역에 사는 주민이 내리는 것이죠. 흔히 지자체가 국가 아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조항이야말로 국가와 지방이 대등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대표 예입니다.”
물론 일본 헌법이 처음부터 이처럼 주민자치 정신을 담고 있던 것은 아니다. 1889년 제정된 메이지 헌법에는 지방자치라는 개념이 한 단어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던 것이 1946년, 이른바 평화헌법이라고도 불리는 일본 헌법 개정 당시 새롭게 도입됐다.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구조”라고 할 정도로 파격적인 변화였다는 게 이케가미 전 이사장의 설명. 자치가 국가 통치구조의 핵심 구성 요소로서 헌법적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은, 아직 헌법에서 그 권한조차 명확히 보장하지 않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는 더욱 부럽게 다가온다.
“지방자치가 국민 권리라는 인식이 헌법에 명확히 반영돼야 합니다. 또 그에 맞는 법률과 제도가 있어야 하고요. 그렇게 법적으로 인정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촌이 자립하는 법: 협력과 공동운영 구조
일본 지방자치법은 헌법의 자치 원칙을 구체화한 법률이다.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대표적인 조항 몇 가지를 중심으로 지방자치법의 구조를 소개했다. 이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지자체 업무를 보조하는 ‘일부사무조합’과 ‘광역연합’의 존재다. 쉽게 말해 ‘작은’ 자치단체라 할 수 없는 일을 함께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단위.
일부사무조합은 병원, 폐기물 처리, 장례식장 등 특정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인근 지자체가 모여 공동으로 운영하는 구조다. 정촌마다 하나씩 지을 수 없는 규모의 사업을 인근 정촌이 모여 공동설립해 운영하는 방식이다. 예산과 인력을 분담해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광역연합은 보다 규모가 크고 다양한 사무를 공동으로 수행하는 연합체다. 시정촌 단위를 넘어 도도부현(우리의 광역지자체 격) 단위로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재정력이 큰 자치단체가 광역연합의 중심을 장악하거나 소규모 지자체를 무시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는 점을 경고했다. 실제로 지방자치법에는 이에 대한 금지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
이 밖에 작은 자치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법적 장치로 ‘지청(支廳)’이 존재한다. 이는 지방자치법 주요 조항 중 하나로, 도도부현이 시정촌 활동을 보조하기 위해 설치하는 기관을 이른다. 자치단체의 자율적 결정을 존중하면서 필요한 행정력을 지원하는데, 여기서 지청의 ‘지(支)’는 ‘지원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구가 적은 자치단체라고 해서 강제로 합병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독립을 선택했다면 이를 지원하기 위해 지청을 설치하는 구조입니다.”
특히 홋카이도(북해도)가 이 같은 지청이 발달된 지역으로, 여러 소규모 자치단체가 지청을 중심으로 행정 협력을 이루고 있다. 이 같은 구조 덕분에 규모가 작은 정촌이라도 합병 없이 독립적으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작은 자치가 보여주는 가능성
이어 그는 일본 농촌 정촌에서 자치가 실제로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두 곳을 소개했다.
첫 번째는 도쿄도에 위치한 히노하라촌이다. 인구는 2025년 기준 1천923명의 자치단체로서 400년 이상의 독립성을 지켜온 곳이다. 공무원만 70명, 의원 8명을 두고 있으며, 1981년 제정된 ‘촌민헌장’을 통해 대규모 개발을 지양하고 의료·복지를 강화하겠다는 방향성을 명확히 밝혔다.
특히 히노하라촌은 2024년 ‘비핵평화선언’을 채택하며 주목받았다. 이는 드물게 지역 자치단체가 세계적 의제에 자발적인 목소리를 낸 사례로, 주민 자치의 힘이 단지 지역 문제를 넘어 전 지구적 가치에까지 닿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은 자치’의 실현이 곧 세계를 향한 책임 있는 연대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이 선언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두 번째는 일본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아오가시마촌이다. 주민은 166명에 불과하지만, 여전히 합병 없이 독자적인 자치단체로 존재한다. 공무원은 28명, 의원은 6명이다. ‘인구가 줄었으니 합병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하는 대표 사례다.
“인구가 줄었다고 자치를 포기할 순 없습니다”
이케가미 전 이사장은 마지막으로, 소규모 정촌들의 자율적 선택이야말로 자치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읍면자치 역시 이런 사례를 참고해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해 갈 수 있으리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인구가 줄었다고 합병이 당연한 것은 아닙니다. 홋카이도에는 인구 2천100명인 마카리촌이 있는데요. 이곳은 정부 주도로 인근 6개 정촌과 합병 논의가 진행됐던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합병 대신 협력 체계를 구축하기로 결정해 독자적인 자치단체를 계속 유지 중입니다. 실제로 마카리에는 촌립 농업고등학교가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유학을 많이 올 정도로 무척 운영이 잘 되고 있기도 하고요. 이처럼 자치는 국가가 강제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공동의 미래를 설계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월간 옥이네 94호
글 박누리
사진 김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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