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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성완 Aug 06. 2018

옴니버스는 삶(사랑)의 형식이다

짐 자무시, <패터슨>


critical path(to film)

1) 최상경로  

2) 필수 공정 중 최대 시간 소요 단계


혹은,

“비평적인 방식으로 영화에 접근함.”





네가 죽을 줄 알고

나는 운다


- 이수명, <밤이 날마다 찾아와> 중에서



 아직 완성하지 못한 짐 자무시(의 영화)에 관한 두 번째 글이 있다. 그것은 그의 옴니버스 두 편(<미스테리 트레인>과 <지상의 밤>)을 함께 묶어 영화에 나타난 시네마틱하고 로맨틱한 움직임-주로 “걷기”-에 관해 쓴 것으로, 그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옴니버스는 사랑의 형식이다.

 따라서 진정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장편을 찍게 된 후에도 계속 단편을 찍는다.

 (주의: 물론 단편을 찍은 모든 장편 감독들이 그랬을 거란 뜻은 아님)


 그 글이 지지부진하던 차에 나는 <패터슨>을 보게 되었고, 그 즉시 이 영화를 통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난 이 글을 먼저 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마치 인생처럼 뜻하지 않게, 세 번째가 두 번째가 되었다.



패터슨은 옴니버스다


 그렇다. 내가 볼 때, <패터슨>은 장편이지만 실상은 옴니버스다. <패터슨>은 월요일의 영화, 화요일의 영화, 수요일의 영화, 목요일의 영화, 금요일의 영화, 토요일의 영화, 일요일의 영화를 지나 다시 월요일의 영화가 시작될 때 끝이 난다. 각각의 “단편” 사이사이마다 밤이라는 자연현상이 앞의 영화와 뒤의 영화를 자연스럽게 교차시킨다. 마치 옴니버스에서 단편과 단편 사이에 가로놓이는 잠깐의 암전처럼.

 따라서 영화에 등장하는 요일을 알리는 자막(monday부터 monday까지)은 각각의 단편에 대응하는 제목으로 봐야한다. 그리고 <패터슨>에 대한 가장 온당한 해석은 그 여덟 편의 단편에 대한 개별적 분석이 선행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글에서 그것을 시도해보진 않겠지만 일단 나는 이 영화를 구성하는 요일별 에피소드를 각각 하나의 단편으로 지칭할 것이다.

 

 각 단편의 시작을 살펴보자. 언제나 함께 잠들어 있는 패터슨과 로라다. 하지만 매번 조금씩 다르다. 어느 날은 서로 마주보고 안고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지난 밤 쾌락의 부유물처럼 발가벗고 있기도 하며, 어떤 때는 패터슨이 늦잠을 자거나 로라가 일찍부터 부산을 떨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들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매번 같지만 매번 다른 시작. 옴니버스의 사전적 정의는 “독립된 짧은 이야기들을 대개 하나의 주제, 소재 등에 따라 엮어 놓은 형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옴니버스를 엮는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패터슨과 로라의 사랑이다. 왜 나는 구태여 그들의 “사랑”이 주제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그들의 사랑으로 인해, 차이 없는 반복이 될 수 있었을 하루하루가 각각 다른 하나의 단편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일, 같지만 다른 하루를 맞이한다. 반복 속에서의 미세한 차이들은 시인(패터슨)의 눈에 예민하게 포착되고 그가 쓴 시는 그들의 하루를 더 아름답게 만든다. 기가 막히다. 아름다워서 눈에 띄고 눈에 띄니 더 아름다워지는 선순환이라니.

 그래서 나는 <패터슨>이 둘의 사랑을 다뤘기 때문에 그것이 장편인 동시에 옴니버스가 될 수 있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장편인 동시에 옴니버스.”


 그러니까 옴니버스도 아니고 장편도 아니다. 옴니버스인 동시에 장편이다. 혹은 장편인데 옴니버스다. 나는 그것이 꽤 좋은 삶과 사랑의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마무리 짓겠다.

 내가 이 영화가 흥미로웠던 건 이것이 단편을 잘 만드는 감독이 단편을 찍듯 장편을 만들어내는 기묘한 방식일 수도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짐 자무시는 오랫동안 헐리우드식 스토리텔링보다는 인생의 단면을 드러내는 데 집중해왔던 감독이다. 그는 이제 인생에 대해 통달한 듯 거의 신비로운 느낌마저 드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영화는 익숙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낯설다. 아마도 그런 느낌의 출처는 이 영화의 독특한 형식 때문일 것이다.


 “장편인 동시에 옴니버스.”


 나는 그와 같은 형식의 미묘함이 새로운 영화의 어떤 가능성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나는 그걸 오래도록 고민해볼 것 같다.



패터슨은 부러움이다


 나는 앞서 “장편인 동시에 옴니버스”가 좋은 삶과 사랑의 모델일 수 있다는 의견을 말했다. 그것은 사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다. 삶이 원래 각기 다른 하루가 모여 이뤄지는 긴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 각각의 하루는 “나”라는 하나의 주제로 엮인다.

 즉, 삶은 이미 그 자체로 장편이면서 옴니버스다. 삶은 장편도 아니고 옴니버스도 아니지만 동시에 장편이기도 하고 옴니버스이기도 하다. 그 미묘함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균형을 찾아내는 것이 삶의 핵심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이뤄내기 매우 어렵다. 그래서 우린 자주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그 방법이란 둘 중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삶은 특유의 아름다움을 잃고만다.

 가령, 장편을 택할 경우 우리는 보통 헐리우드식 스토리의 틀에 우리 삶을 끼워맞춘다. 분명한 목표(동기)에 따라 초인적 노력을 하고 좌절하더라도 그때마다 꿋꿋히 일어나 마침내 꿈을 이루는 스토리 말이다. 그래서 우린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현재를 과감히 “투자”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하루는 하나의 단편이 되지 못하고 삶은 수익모델화된다.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삶의 “장편적 속성”을 모두 버리고 오직 오늘 하루의 쾌락에만 몰두하는 경우다. 전자는 행복을 느끼기 어렵고 후자는 미래가 없다. 따라서 어느 쪽도 완전하지 않고 어느 쪽도 충분히 길게 행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아직은 모른다.* 다만, 패터슨의 삶이 우리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그는 소박한 삶을 유지하면서 그저 하루하루를 온전히 감각하고 살아내는 것에 집중한다. 그것이 모이면 괜찮은 장편이 될 거라 기대하면서. 그리고 아마도 그 장편은 그가 사랑하는 로라와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그는 함부로 돈 버는 일을 포기하거나 삶을 낭비하는 일에 몰두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보고 난 뒤 그가 꽤나 부러웠다. 그가 자신만의 균형을 찾아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보면 그가 시를 출판하는 것을 망설이는 것도 이해된다. 그는 스스로 찾아낸 균형을 잃어 버릴까봐 두려운 것이다.



패터슨은 사랑을 지속하기 위한 지침서다


 <패터슨>이 좋은 삶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그것은 동시에 좋은 사랑의 모습일 수 있다. 좋은 삶의 에센스는 사랑이니까.

 삶이 죽음을 동반하듯 사랑은 언제나 이별을 동반한다. 사랑이 시작된 순간부터 이별도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이별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이왕이면 그것을 늦춰가면서 되도록 오랫동안 사랑을 지속시킬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현명하다. 이쯤에서 나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한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이렇게 탄식했다.


 매일 잠을 자면서 죽음을 나눠 갚을 수 있다면!


 안타깝게도 죽음은 그럴 수 없지만 어쩌면 이별은 그럴 수도 있다. 패터슨과 로라는 함께 살면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일상에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연락도 하지 않는다. 사고가 났을 때도 패터슨은 로라에게 연락하지 않으며 집에 와서도 그녀가 묻고 나서야 비로소 버스 사고에 대해 털어놓는다. 마치 그 소식이 그녀의 일상을 망칠까 저어하는 듯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건 그 시간(낮부터 저녁)동안 그들이 짧은 이별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일매일의 짧은 이별로서 완전한 이별을 분납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이 사는 듯도 하고 따로 사는 듯도 하다. 서로의 인생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공존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 사이에 얼마나 깊은 믿음이 자리잡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들은 매일 정말로 만나고 매일 정말로 헤어진다.* 매일 헤어지면서도 매일 다시 만날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이 부부임에도 그들의 만남과 이별은 그 하나하나가 드라마다.

 반면, 그들과 달리 습관처럼 만나면서도 서로를 정말로 만나지 못하고, 그래서 제대로 헤어지지도 못하는 연인이란 얼마나 지리멸렬한가.



여기서부터는 사족이다


 영화는 또다시 월요일의 단편을 시작하면서 끝을 맺는다. 패터슨과 로라. 그들도 언젠가 그들이 찾아낸 균형을 잃어버리는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생긴다거나) 그때 그들이 현명하게 그 고비를 넘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나도 그들처럼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그보다 두 배의 진심으로 바란다.*

 이런. 한참을 쓰고 보니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잠정적 결론과는 미묘하게 달라져 버렸다. 마치 인생처럼 뜻하지 않게.





* 그래서 나는 목표나 할 일을 아무 종이에나 적은 뒤 함부로 다뤄서 결국 잃어버린다. 심지어 날짜도 적지 않고 언제나 “오늘 할 일”이라고만 적는다. 그것은 내가 장편과 옴니버스 사이에서 찾은 나름의 합의점/궁여지책이다.


* 여기서 내가 의미하는 “정말로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만나는 것을 넘어서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서 상대방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 반대는 그 시간과 에너지를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며 그럴 때 상대는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는다.


* 그러려면 어찌 해야 할까. 우선, 패터슨처럼 핸드폰을 소유하지 않는 것은 어렵더라도 너무 많은 연락은 지양해야겠다. 그나저나 카톡 개발자들은 그들의 “1”이 사랑은 물론 관계에 있어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 알고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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