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도망칠 기회가 남아있다.
결혼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람일은 모르는 거라던 PT쌤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맞는 말이다. 청첩장 돌리고도 파혼을 하니까.
결혼식장 들어간 후라고 뭐가 다를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혼도 하는 마당에 파혼이 무슨 대수랴.
남얘기에 관심 많은 대한민국에서 특히나 인기 많은 주제는 남의 연애사 그리고 다툼.
그 둘을 합쳐놓으면 ‘파혼’.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보고 있자면 한 편의 드라마가 따로 없다.
파혼의 이유야 오만 가지 수만 가지가 있겠으나 이유가 어찌 됐든 차치하고, 그저 어디 속시원히 털어놓을 곳이 없는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익명의 힘을 빌려 사연을 털어놓기도 한다.
친구에게도 부모님께도 말하기 부끄러운 이야기라 일면식 없는 사람에게라도 하소연을 해보는 것이다.
그런 사연들 중 단순한 성격차이, 집안차이, 가치관차이 말고도 분명한 유책사유가 있을 때가 있는데
누가보아도 결혼을 해서는 안될 타당하고 마땅한 일이 있을 때.
그럴 때, 댓글창은 시끌시끌 난리가 나고 댓글이 100개가 넘게 달린다.
살펴보면 100개 중에 100개 모두가 파혼을 외치고 있다.
내 얘기 아니라고 쉽게 파혼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한시라도 빨리 도망치길 바라는 진심 어린 걱정이다.
(물론 모든 사연에서 그렇지는 않다. 때로는 별것도 아닌 일에도 파혼하라고 밥 먹듯이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긴 있다.)
그 러 나! 절-대 파혼은 말처럼 쉽지 않다.
남 얘기니까 쉽게 하는 말이 아니라, 어려운 걸 알지만, 그걸 알면서도 파혼보다는 결혼 후의 삶이 더 힘들게 눈에 보이기 때문에 파혼을 외치는 것.
나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파혼이 흠이 되던 시절이었다.
남자가 바람피우는 거야 살다 보면 한 번 그럴 수도 있는 거고~ 라며 넘어가주라던 시절의 이야기.
내 친구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결심했다.
요트에서 멋지게 프로포즈도 받았고.
키 크고 잘생긴 그녀의 남자친구는 누가 보아도 훈훈한 느낌이 폴폴 풍기는 훈남이었다.
선남선녀의 만남, 게다가 연애도 꽤나 길게 했고, 이대로라면 아마 둘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부부가 되었을게다.
그가 그녀를 두고 한 눈을 팔지 않았더라면 말이지.
그녀는 나에게 청첩장을 건네면서도 과연 그 결혼식을 정말 올려도 되는지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상대의 바람 전적을 알았는데.. 모르면 몰랐지 알고도 결혼을 강행하려니 마음이 얼마나 어렵겠어.
그렇지만 알았다고 해서 당장 파혼을 결심하는 것도 결코 쉽진 않지.
이미 청첩장을 건넬 때였으니 결혼식이 코 앞, 끽해야 한두 달 남은 상황이니까.
이미 웨딩홀 잡았고, 신혼집에 혼수도 다 넣었고, 청첩장은 돌렸고, 결혼식이 그야말로 코 앞인데 결혼소식 알리자마자 파혼소식을 알린다는 게 어떻게 쉬울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만의 문제도 아니잖아.
"나 남자친구랑 헤어졌어"와 "내 딸 파혼하게 됐어"는 아주 다른 문제.
부모님께 죄송하고 송구스러운 마음에라도 한번 더 망설여지는 게 자식 마음이다.
그걸 모르지는 않지만, 알기에 더욱더 그녀의 손을 다잡고 말했다.
"너 지금까지 결혼준비 한 거 아까워할 필요 하나도 없어. 혹시라도 아니다 싶으면 지금이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물론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하고 산다고 해도 난 너 축복하고 응원할 거야. 네 결정이니까. 그치만 네가 헤어진다 해도 난 너 응원해. 아니 더 응원해." (다시 말하지만, 파혼이 흠이 되던 시절이었다.)
자신의 결혼식에 참석해 달라 초대하는 사람에게 내가 뭐라고 이래라저래라 헤어지기를 종용하는 말을 하는 것이 스스로도 차마 입 떼기가 힘들고 어려웠다.
조심스러운 걱정을 떠안고도 어쨌든 결혼식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였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나 한 사람의 응원이라도 더하여 바보 같고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길 바랐다.
조금만 더 용기를 내서 결정하기를.
고맙게도 똑똑하고 현명한 내 친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혼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난 그녀에게 너무나 잘한 결정이라고, 모든 것을 다 이겨낸 너는 너무나 멋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요즘이야 바람피우면 바로 파혼각이다.
쉬이 넘어가 주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아닌 걸 알면서도 흐린 눈 하고 결혼을 강행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그러나 그때에는 모든 부담과 압박이 있었을 텐데도 굳게 마음먹고 당차게 행동한 친구의 용기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실은 파혼 못할 줄 알았다.) 멋진 녀석.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처박고 새 출발 하면 되는 거다.
이제 그녀는 똥차 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
남은 건 나의 결혼뿐.
결혼식 한 달 전, 마무리 준비에 정신없이 바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에 안도하고 있다.
파혼이 나라고 비껴가란 법은 없으니까.
어쨌든 별 일 없이 무사히 지나옴에 감사하다.
그리고 여러분, 파혼 물론 어려운 결정이지만 도망칠 기회는 지금뿐입니다.
배우자는 내 손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에요.
부디. 부-디 후회 없는 선택하시기를 거듭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