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사람의 딜레마(Dilemma)
- 사 글 -
'내가 잘하는 것을 선택하느냐 A,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느냐 B'의 딜레마. 간단구성적 양도 논법에서 A냐, B냐를 소전제로 정의한다면, 결론은 C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그저 일하고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이야기일까? 어쩌면 '잘 일'과 '싶 일'에 구분을 두는 것은 결론 없는 소모적인 고민일지도.
어느 날 문득, 길을 걷다가 버스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스마트폰 배터리가 닳는 바람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한테 맞는 건가'. 하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다. TV에서 봐오던 것처럼 멋지게 PT 하고,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따오고, 실적이 좋아 급승진하고. 그런데 현실에서의 주어진 역할은 '잡일'이다. 끝날 줄 모르는 잡일. 그 일을 하자고 잠 줄여가며 밥도 걸러가며 학비 들여가며 공부한 건 아닌데 싶다. 사회초년생에게 '꿈이 뭐였어요'라고 물으면 '여행 작가'였단다. 얼마나 멋진가. 해외여행하며, 비행기 안에서 셀피를 찍어가며, 사진 몇 장과 남들이 못쓰는 영역의 글들을 끄적거리고, 공감받고, '저도 작가님처럼 되고 싶어요'하는 부러움을 사는 직업. 멋지지만 '언젠가의 꿈'으로 남겨 두겠다고 한다.
당신이 그런 것처럼 나도 그렇다. 어쩌다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만나면 부럽다 못해 질투까지 난다. 심지어 '하고 싶은 일'이 직업이 되는 느낌을 모르겠다.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대게는 '잘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못하던 일'에서 시간을 얹으니 나도 모르게 '잘하는 일'로 바뀌었을 뿐이라도 다들 그렇게 산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살고 있다고 위안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시간과 카드 한도는 유한하고, 나이를 먹고, 언제나 택일(擇一)하는 삶을 살아온 관성 때문에 지금도 내일도 선택할 것이다. 남들이 쓴 구매후기를 꼼꼼하게 읽는 데 당신이 쓴 시간은 택일의 실패에 대한 로스를 가성비로 계산했을 때 꼭 필요한 투자가 아니던가. '싶 일'보다 '잘 일'을 선택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러한 관성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왜 가지지 못한 것에 후회와 동경을 보내며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걸까. 좀 더 현실적이고 확실한 답을 얻고 싶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질문을 바꿔야 옳다. '잘 일이냐, 싶 일이냐'가 아니라, '원해서 하느냐, 마지못해 하느냐'라는 질문으로.
비슷하지만 해답을 얻기 좋은 질문은 후자다. '일을 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라는 원초적인 반문은 접어두고 직업을 선택하는데 있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말 원하는 건지, 마지못한 건지 돌아봤으면 좋겠다. 마지못해 하는 일에서는 의욕도, 목표도, 성과도, 만족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전자의 질문이 어떠한 개입 없이 오롯이 내 주관으로만 판단하고 선택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면, 후자의 질문은 나와 관계된 것들에 책임과 결과를 공유한다. 즉, 당신의 만족이나 불편이 나에게도 잘 전달된다는 말이다. 업무실적, 대인관계 등 그 어떤 형태로든지.
종종 팀원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이렇다. '이 일을 원하는 거면, 가서 먼저 깃발을 꽂아'. 누구보다 잘 하도록, 하고 싶은 일이 되도록. 작은 성취를 계속 만들어 내면서 이 판에서 정점을 찍어보겠다는 의지도 좋다. 내게 주어진 '잡일' 속에서도, 남들이 찾아내지 못한 규칙을 발견하고 개선하는 것도 성과의 부분이 되고 성취와 연결된다. 성취를 몸으로 기록하는 과정의 반복은 조직 내에서 '신뢰'라는 형태로 차곡차곡 쌓인다.
작은 성취와 만족. 직장인의 삶을 정의하는 단어가 아닐까. 원하는 일이 잘하는 일로, 그 영역에서 성취와 만족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는 것. 피상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늘상 일어나는 일들이다. 마지못해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하고 있다면 쿨하게 관두자. 당신의 관둠이 당신과 동료에게 행복을 맛보게 해줄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