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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영 Sep 23. 2021

음악을 대하는 자세

마음에 남겨진 순간들

아주 더운 여름날이었다. 볕을 피하려 뒷걸음질 치다 옆 건물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은 ‘Dive record’. 레코드라면, 음반 가게일까? 일정이 빡빡하지는 않아서 잠시 딴 길로 새어보기로 했다. 좁은 계단을 한 층 오르자 보이는 입구. 보아하니 새로 생긴 곳 같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그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멀끔한 실내와 은은한 향기에 들어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이미 몇몇은 구경을 하고 있고, 사장으로 보이는 모자 사나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이곳은 LP만 판매하는 곳이었다. 턴테이블도 따로 없는 내게 해당 사항이 없어 보였지만, 더 구경하고 싶어 조금 더 있기로 했다. 몇 분을 구경하다 또 놀라고 말았다. 당최 내가 아는 뮤지션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가요는 잘 모르지만, 팝에 있어서는 꽤 오래도록 다양하게 들어왔기 때문에 웬만한 음반 가게에서도 금방 반가운 얼굴을 찾고는 했다. 2년 전 오사카의 중고 음반 매장에서도 좋아하는 앨범을 쉽게 찾아냈는데 다름 아닌 한국에서 이렇게 문외한이 될 줄이야.


그래서일까.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우연히 들어선 음반 매장에서 모르는 앨범이 대부분이었던 그때와 닮아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가늠하며 골랐던 그 맛이 떠올랐다. 앨범 한 장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듣던 그 시 절처럼, 어쩌면 여기에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심한 나는 용기를 내 사장님께 물었다.


“혹시 브라질 음반도 있을까요?”


보통의 음반 매장에서는 이 질문을 할 수조차 없었다. 가요 음반이 반 이상 매대를 차지하기도 했고, 재즈와 삼바를 구분하지도 않는 곳이 태반이었으니. 게다가 그런 매장들마저 하나둘 가게를 접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곳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든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사장님은 만지고 있던 턴테이블의 음반을 갈아 끼우고는 들려줬다. 브라질 음악이었다. 그것도 내가 모르는.


“정말 좋은 브라질 음반이 들어왔었는데 하루 만에 다 사가셨어요.”


세상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물론 마스크 안이라 몰랐을 테지만 확장된 나의 동공만은 보았을 것이다. 브라질 음반을 취급하다니, 그것도 사람들은 어떻게 다 알고 벌써 사 갔다니. 외국에나 나가서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눈앞에 펼쳐지니 나는 조금 대담해져 계속해서 물었다.


“제가 턴테이블이 없는데, 이제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저렴한 거로 시작하셔도 충분하세요. 좋은 턴테이블은 많지만, 우선 음반을 하나하나 모아 보세요. 그리고 어느 정도 모이면 그때 값진 걸 사셔도 충분해요. 그나저나 이 음반 조금 듣다가 가세요.”


턴테이블의 사용법을 몇 분 동안 알려주고는 쿨하게 사라진 사장을 뒤로하고 나는 브라질 음반을 만끽했다. 그 기쁨을 나만 느끼기에는 아쉬워서 짝꿍과 한 번 더 왔고, 그녀 역시 홀딱 빠져버리고 말았다. 휴대폰으로 들었을 때와 는 또 다른 느낌이라고 할까. 글로 표현하기 힘든 지점이 있지만, 그 매력에 퐁당 빠진 우리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날 이후로 턴테이블을 들이기로 했다.


Lemon의 매장 한쪽에 놓여있던 판다 턴테이블. 왼쪽 귀는 무려 마이크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고 운명의 턴테이블을 맞이하게 되었다. 안국역 근 처에 있는 'Lemon'이라는 곳에서 판매하는 포터블형 턴테이블이었다. 가지고 다닐 수 있게 손잡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뚜껑에 판다 모양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그 판다의 귀를 뽑으면 무려 마이크로 변신하는 최강의 귀여움 을 장착한 턴테이블이었다. 음량도 실내를 가득 채울 만큼 빵빵했고, 건전지로 도 구동이 가능했다.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고 지갑은 금세 다이어트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Dive record'로 향했다. 더 얇아질 지갑에게 는 미안했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사장님께 여쭈었다.


"브라질 음반 있나요?"


마침, 추천 음반이 있었다. 81년도에 브라질에 나온 음반으로, 최근에 영 국에서 판권을 사서 재발매된 명반이라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보사노바와 삼바가 미국의 소울과 훵크와 합쳐진 색다른 음악이 수록되어있었다. 구매하기로 한 다음 사장님이 내어주시는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브라질 음악을 좋아해서 싱글 음반을 낸 적이 있다고 말씀드리니 아주 반가워하셨다. 우리는 두 시간이 넘도록 음악과 LP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져요."


LP를 바라보며 말씀하셨던 사장님의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휴대폰으로 수만 곡을 손쉽게 듣는 요즈음에 때아닌 LP 사랑이 별스러워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그 말을 근거로 삼기로 했다. 한 장에 4-5만 원 하는 음반을 사서 흠이라도 날까 두려워하며 턴테이블에 놓고 바늘을 조심스레 올려두는 그 시간이 참 좋다. 아직은 한 장뿐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음반을 꾸준히 늘려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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