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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타는지성인 Mar 20. 2024

칵투스 타임

런던에 도착한 그를 반긴 건 우중충한 날씨 속의 비였다. 아무렇지 않게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비 오는 거리에 비니 하나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그는 그녀를 기다렸다. 도착시간에 맞춰 온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꼈다. 한국에서와는 다른 표정, 다른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그녀는 자신의 남편보다 선인장을 사랑했다. 왜 선인장이라고 그가 물었을 때 그녀는 선인장이 품고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말했다. 그는 선인장을 사랑하는 선인장 같은 그녀를 더 사랑했다. 그건 그녀가 말하는 가능성이었다. 그는 그녀의 모든 몸에서 가시가 나와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렇지 그게 선인장이야라는 그녀의 말에 그는 그녀를 더 사랑했다.

그가 그녀를 사랑할수록 그녀는 더 멀어져 갔다. 그녀는 이런 시간을 오늘로 그만두자고 말했다. 그 역시 언젠가 끝날 시간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다만 간직하고 싶었다. 물 없이 오래 살아갈 수 있는 선인장처럼, 자신 역시 사랑 없이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선인장이 되고 싶었다.

서울에선 사랑할 수 없다는 그녀는 서울이 아니면 어디면 되냐는 그의 물음에 그녀는 런던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그림은 알 수 없는 그녀처럼 선인장의 형태를 띠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그림을 계속 보게 했다. 모호한 선과 점들, 알 수 없는 모양에 익숙한 색채는 분명 그녀가 보였다. 처음엔 그녀의 그림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에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본 풀의 색깔과 하늘의 색깔, 그녀의 피부, 머리카락, 쇄골 밑의 점. 그가 그림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덧 그는 그녀를 통해 그녀의 그림을 보고, 그녀의 그림을 통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우리가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간에서 만났다면, 어땠을까? 그녀가 물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 있는 아침을 좋아했다. 그녀가 없는 평범한 밤이 아닌 하루 밤에도 몇 번은 찔려서, 아팠을,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사랑한 긴 밤을. 런던에서 그녀는 그를 더 사랑했다. 마치 한국에 모든 걸 놓고 온 것처럼, 처음부터 런던에 있었던 것처럼, 런던은 그녀에게 색채를 주었다. 아주 어쩌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마주 하기 위해 살아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를 본 건 서울이었지만 우리는 런던에서 처음 만난거야.


그녀는 아이패드에 그린 그림 같은 선인장을 선물했다. 한국에서보다 분명해진 선인장의 형태였지만 그는 그녀와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도착한 후 짧은 포옹을 뒤로, 집에 가는 길, 그 이후로도 그는 런던의 마지막 밤을 떠올렸다. 무슨 말을 해야 했을까, 어떤 말을 했으면 나는 그녀와 함께였을까라고.

한국에서 혼자 남은 그는 관심이 없어도 살아나가는 선인장처럼 살아나갔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는 가끔 그녀가 생각이 났고, 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질 때면 선인장 그림을 보며 울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지만 그는 그녀의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에도 가지 않았다. 진짜 마지막이라는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인장을 그리고 싶어졌다. 왜인지는 몰랐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림을 배우고 싶어서 모인 사람은 6명이었다. 그는 처음 미술선생님을 봤을 때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닮은 게 아니라 그리는 모습에서 그녀를 본 것이었다. 미술선생님은 자신을 해원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각자 그림을 배우기에 앞서 각자 어떻게 해서 그림을 배우러 온 건지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사실을 말할 수도, 아니면 평범하게 말할 수도 있었다. 평범하게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미술재료들과, 곳곳의 그림에서 그날의 감정이 떠올랐고, 그녀가 생각났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림을 보여주고 싶어서요.라고 말했다.

그림을 그릴 때 모두가 진지하게 스케치를 했다. 무슨 색이 칠해질지는 머릿속으론 그려졌지만, 손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떤 곳은 삐딱한 선이, 둥글게 그려져야 할 곳은 삐딱한 선이 되어 그려지고 있었다. 손이 맘대로 되지 않는 시간에 그는 자신의 몸이 의심스러울 만큼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다른 참가자가 그리는 것을 봤다. 완전히 보이진 않았지만 보이는 부분까지 봤을 때는 그가 생각하기에는 충분한 실력이 있는 그림들이었다.

몸이 잘 따라주지 않죠?라고 말을 건네며 다가온 해원은 그의 손을 잡고 스케치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의 그림은 해원의 손을 따라 점점 그림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더니, 몇 번의 터치만으로도 꽤 훌륭한 그림이 되어 있었다.

그림틀이 좋았어요.

쉬운 일이라는 듯 말하며 해원은 자리로 돌아가 잠시 쉬고 나서 색을 칠하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표현하는 색상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피부, 머리카락, 쇄골 밑의 점. 그리고 그녀의 색이었던 풀, 하늘. 그녀가 아니라면 몰라야 할 그림이었다. 그의 그림은 세상에 둘만 아는 암호였다. 처음으로 선택한 색과 점점 섞여 들어가 세상에 없는 색을 만들어가며 무언가를 창조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색을 조합해 나갔다. 어쩌면 그림보다 색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그러나 원하는 색상은 나오지 않았다. 최대한 그녀와 닮은 색을 떠올렸고, 녹색과 노란색, 검은색, 파란색, 자신이 알고 있는 색을 조합했다. 시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색을 조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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